대호군·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등의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383년(우왕 9) 오도체복사(五道體覆使)로 임명되어 군대의 위용과 장비 상태와 복무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검열하였다.
이 해 10월에 체복사로서 양구에 침입한 왜구와 싸웠으나 패전하여 춘주(春州: 지금의 춘천시)로 퇴각하여 둔을 쳤는데, 적이 춘주까지 뒤쫓아 와서 함락시키고 가평현을 침략하므로 원수 박충간(朴忠幹)과 함께 싸워 이를 쫓고 적 6명을 베었다.
또한 1385년 왜선 150척이 다시 함주·홍원·북청·합란북(哈蘭北) 등지에 침입하여 백성을 거의 다 죽이고 사로잡아가자, 심덕부(沈德符), 지밀직(知密直) 홍징(洪徵), 밀직부사 안주(安柱),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과 함께 홍원의 대문령(大門嶺) 북쪽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여 도망하였다.
1388년 우왕이 사람을 보내 최영(崔瑩)의 딸을 비(妃)로 맞이하고 싶다고 하였으나 최영이 거절하였다. 그때 최영의 휘하에 있으면서 우왕의 뜻을 따르라며 최영을 설득시켜 마침내 그 딸이 영비(寧妃)가 되었다.
이 해 4월에 문달한(文達漢), 김종연(金宗愆) 등과 함께 요동정벌군의 진영에 가서 금과 은으로 만든 술그릇과 의복을 주어 여러 장수들을 진무하였다. 6월에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오니 이를 피해 도망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로잡혀 최영과 한 무리였으므로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졌다가 영해로 유배되었고, 창왕이 즉위하자 귀양지에서 참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