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賭租)’·‘도지(賭只)’·‘지정(支定)’이라고도 한다.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부터 나타났으며, 특히 궁장토(宮庄土)·역둔토(驛屯土)·묘위전(墓位田)·사전(寺田)·서원전(書院田)과 대동강 연안과 황해도 평야지대 일부에 많았다. 또한, 호남·호서 지방을 시작으로 중남지방에도 점차 확산되었고, 1930년에는 소작형태 중 19.2%, 1974년에는 50.2%로 증가되었다. 소작료는 토지의 면적과 비옥도, 이래의 생산량과 예상 수확량으로 산정되었고, 합의를 보지 못한 경우에는 지주측 주장대로 결정된 예가 흔하였다.
소작료를 이렇게 미리 정해야 했으므로 수리시설이 미비하여 생산량이 불안정하던 논보다는 밭의 경우에 더욱 보급되었다. 현물을 주로 하였고 금납(金納)도 약간 있었다.
소작료는 생산량에 대한 비율로 환산하면 조선시대에는 30∼50%였고, 소작인은 종자·비료·농기구와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또, 일제강점하에서는 40∼60%였고, 세금만은 지주와 소작인 단독, 혹은 둘이 함께 부담하였다. 이렇게 소작료가 증액된 이유는 생산력의 증대도 있었지만, 지주들이 더욱 상업적인 이득을 꾀하였던 까닭도 있다.
계약시 지주는 어느 때라도 소작료를 증감할 수 있었다. 소작인은 생산물을 자유롭게 수확하고 가공했지만 소작료는 지주가 지정하는 장소까지 기일 내에 운반해야 했다. 타조법(打租法)에 비해 소작료의 체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점을 대비하여 지주는 양도와 담보 금지, 차압 등 엄격한 계약조건을 제시하였다. 만약 재해를 만났을 때는 소작료를 감면해 주기도 했지만 소작인의 태만이나 질병에는 혜택이 없었다.
정조법의 특징은 소작료의 정액이었으므로 농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주는 생산의 비용, 위험과 손실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관리비도 절약할 수 있었으므로 소작인의 경작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자산을 가진 소작농은 정조법으로 자유스러운 농업 경영을 할 수 있고, 집약적인 농법을 채용하여 소득을 증대시킬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