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이 관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무예가 있었다. 1354년(공민왕 3)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인주(麟州: 평안북도 의주지역)에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쳤다. 1362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공민왕의 흥왕사 행궁에 침입하였던 김용(金鏞)의 잔당들을 순군(巡軍)에서 국문하였다.
그 해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세워, 최유(崔濡)를 앞세워 고려에 침입하려 하였다. 이 때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지지하였던 정찬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按撫使)가 되어 한휘(韓暉)와 함께 원나라의 침입에 대비한 병영을 내왕하며 군사의 동정을 살피는 일을 맡았다.
1364년 최유를 앞세운 원나라 군대를 물리친 뒤 휘하의 병마사 목충(睦忠)이 재상 목인길(睦仁吉)의 세력을 믿고 정찬을 시기한 나머지 덕흥군과 밀통한다고 무고하여 투옥되었다. 조정에서 정찬을 순군옥에 가두고 목충과 대질하였으나 누명을 벗지 못하자 그 해 2월에 울분으로 옥중에서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