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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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와장 / 한형준
제와장 / 한형준
공예
개념
기와를 만드는 일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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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기와를 만드는 일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
내용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경국대전』 공장조(工匠條)에 조선시대 법정공장 중 건축분야 종사직으로 개장(蓋匠) · 와장(瓦匠) 등이 나타나고 있다. 기와 만드는 공인은 와서(瓦署) 소속으로 40인의 정원을 책정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와장에 관한 기록을 보면, 당시 도성의 거주민이라도 일반 민가는 대체로 기와를 이용하지 못하였으며, 1426년(세종 8) 큰 화재가 있은 뒤 민수용(民需用)의 기와를 만들기 위하여 별요(別窯)를 설치하고 1년에 수십만 장의 기와를 구워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조(提調)와 감역관(監役官)을 차정(差定 : 사무를 담당시킴)하고, 와장 40명은 승려를 우선적으로 초정(抄定)하며, 조역인 300명은 자원인과 지방의 승려로 충당하되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지급하였는데, 승려는 그 부역일수와 근무성적을 보아 상직(賞職)한다고 하였다.

또한, 와장과 조역인에게 주는 공급품과 흙을 이기는 소[踏泥牛]의 사료는 초년에는 정부에서 지급하되 다음해부터는 기와 판매대금으로 충당하며, 와요(瓦窯)의 기타부분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마련하게 할 것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조선 초기의 것이 후기의 것보다는 낫다고 하나 기교가 거칠어 고려시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공전(工典)의 잡령(雜令) 조목에는 “기와를 법의 규정대로 하지 않고 함부로 만들어 품질을 열악하게 한 자는 엄중 처벌한다. 다만, 사영(私營)의 요(窯)이면 처벌한 뒤 그 기와는 관에서 몰수하고 삭목[木形]은 낙인을 찍어 표를 하여 놓는다.”고 하였다.

현황

근세에 들어와 가옥이 신건축으로 대체됨에 따라 점차 전통가옥이 줄어들면서 자연히 와장의 기능이 소멸될 지경이므로, 국가에서는 1988년 전라남도 장흥의 한형준(韓亨俊)을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 제와 기능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2019년 고 한형준의 문하에서 제와 기능을 전수받은 김창대가 신규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제와장(製瓦匠)-』(문화재관리국, 1987)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노동법제(勞動法制)』(이종하, 박영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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