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태조 1)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교동에 설립되었으며, 1435년(세종 17) 안무사(安撫使) 최해산(崔海山)이 중건하였고, 1466년(세조 12) 절제사 이유의(李由義)가 중수하였다.
1536년(중종 31) 목사 심연원(沈連源)이 명륜당을 개축하고 향학당(鄕學堂)을 건립하였으며, 1582년(선조 15) 목사 김태정(金泰廷)이 가락천(嘉樂泉) 동쪽 고령전(古齡田)으로 이전하였다가, 1668년(현종 9) 목사 이인(李(土+寅))이 전에 있던 위치로 다시 이전하였다. 1724년(경종 4) 화재로 소실되어 목사 신유익(愼惟益)이 가락천 동구지(東舊址)로 이전하였다가, 1754년(영조 30) 목사 홍태두(洪泰斗)가 남문 밖 광양으로 이전하였다.
1793년(정조 17) 목사 조명집(曺命楫)이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827년(순조 27) 목사 이행교(李行敎)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851년(철종 2) 이현공(李玄功)이 서재(書齋)를 건립하였고, 1854년 계성사(啓聖祠)가 건립되었으며, 1872년(고종 9) 목사 조의순(趙義純)이 중수하였다. 1946년에는 이곳에 중학교를 설립하였다가 1957년 학교 확장에 따라 동무(東廡)·서무(西廡)를 철거하였고, 1978년 대성전을 개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계성사·좌우 협문 등이 있고,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