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의 한국사상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양성화되고 있던 각종의 정치·사회상이 국내에 투사(投射)된 결과, 민족독립운동의 방법과 노선이 크게 분화되거나 다양화되어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적 형세와 조류는 가장 먼저 학생계에 투영되었고, 거기에 따라 학생운동도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1923년에 결성된 조선학생회나 1924년에 결성된 조선학생총연합회만으로는 학생들의 구심체 구실을 담당할 수 없는 새로운 정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5년 5월초에 사회교육의 연구와 민중본위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공학회가 북풍회(北風會)계통의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의 조직 목적과 구성원들의 경향이 일제당국으로부터 좌경적이라는 이유로 불온시 되어 조직된 지 6개월 만인 11월에 해산당함으로써 큰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창립은 항일학생 민족운동사의 새 단계를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단체가 해산당하자 소속 학생 중의 일부분은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계(火曜會系)와 제휴하여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또 다른 학생들은 사회주의계 서울파의 후원으로 경성학생연맹을 조직하였으며, 공학회의 주류는 재조직 공작을 전개하였으나 탄압으로 실패하자 북풍회계의 후원으로 서울학생구락부를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