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작(金鴻爵)·강일성(康一成)·최윤옥(崔允鈺)·김유창(金裕昌) 등이 평양부 내외에 있는 1만여 육체노동자의 지식계발, 권리옹호,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22년 8월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발기인 총회에서 회장에 김홍작, 총무에 강일성, 서기에 최윤옥 등이 선출되었다. 다음달 9월 1,000여 명이 참석하여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설립 목적은 ① 노동자의 지식을 계발하고 품성을 도야하여 인격을 향상한다. ② 직업을 소개하고 환난(患難)을 구제한다. ③ 저축을 장려하고 낭비를 금하여 생활을 개선한다. ④ 위생을 장려하고 공동방역에 노력한다. ⑤ 회원간 서로 친애하고 상부상조하여 일치단결한다는 등이었다.
창립 직후 발표된 조선노동동맹회 선언에서 “노동자들이 매일 12시간 내지 18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자기 한 몸 따뜻하고 배부르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부모 처자가 아파도 치료를 받게 할 수가 없는 것은 자본가들의 수탈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노동동맹회의 깃발 아래 모이라”고 하여 노동자의 빈곤이 자본가의 수탈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1922년 9월 박일병(朴一秉)으로 하여금 강연회를 개최하도록 하여 회를 선전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는 대일의원(大一醫院) 등 평양에 있는 여러 병원에서 회원들이 치료를 받을 경우, 치료비의 반액을 할인받을 수 있도록 혜택을 주었다.
같은 해 6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하부조직을 개편하여 기존 구역별 조직과 직업별 조직의 두 가지 형태에서 직업별 조직의 단일조직 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 매주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7월 노동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는 일본 해군성 탄광의 조선인 광부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참석하여, 진병기(陳秉基)·한해(韓海) 등의 ‘우리의 살 길은 단결’이라는 강연을 듣고 강연회장에서 이들 1,000여 명이 회원으로 입회하였다.
또한 탄광에 조선노동동맹회 출장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8월평양에 있는 5월청년회·평양양말직공조합 등과 함께 노동자구제회를 결성하여 수해를 당한 무산자 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9월 서울에서 조선노동연맹회·광주노동공제회(光州勞動共濟會)·광주소작인연합회·순천농민회연합회 등과 함께 전조선의 노동단체와 소작인단체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준비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집회금지로 좌절하였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에 가입하였고, 6월 암태도(巖泰島) 소작쟁의 지원모금 및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