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정관(靜觀).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20년 8월 대조선독립보합단(大朝鮮獨立普合團)의 총무 김동식(金東植)이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광봉동(光峯洞)에 피난와서 그 마을에 사는 김내홍(金迺洪)을 재무부장으로 하고 단원과 자금을 모금할 때, 김내홍의 소개로 김도원(金道源)·박초식(朴初植)·김인상(金仁尙)·이광세(李光世) 등과 함께 입단하였다.
대조선독립보합단은 김중량(金仲亮)·김동식 등이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동암산(東岩山)을 근거로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기맥을 통하고 있던 대한독립청년결사대를 발전시켜 조직한 단체였다.
이후 1920년 11월 4일 이광세와 함께 평안북도 용천군 외사면(外士面) 안평동(安平洞) 박초식의 집 앞 뜰에서 구입해 온 화약으로 폭탄 11개를 제조하고, 그 가운데 여덟 개는 같은 마을 김인상의 집에 은닉하고, 3개는 휴대하고는 철산, 용천, 선천, 의주 등을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동년 11월 27일에는 이광세 외 2인과 함께 평안북도 용천군 읍동면(邑東面) 양책리(良策里)에 있는 이일영(李日英)을 방문해 군자금 100원을 모금하고, 전자범(全子範)에게서 어음 4,500원의 제공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모금한 군자금을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며 활동 중, 1920년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도원(金道源)이 종로경찰서 순사 이정선(李廷善)을 사살한 사건으로 인해 조직이 발각되어, 이윤성(李允成)·이일화(李一華)·이광세(李光世)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2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활동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조원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