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통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상장군, 호군, 도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관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06년(충렬왕 32)
본관
탐진(耽津)
출생지
탐진(耽津)
주요 관직
중랑장|상장군|호군|도첨의찬성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후기 상장군, 호군, 도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관리.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탐진(耽津: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이다. 바둑을 잘 두어 중랑장(中郎將)으로 있을 때 원나라 세조(世祖)의 부름을 받고 가서 원나라 명수와 대결하여 승리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으며, 이에 원나라에 수시로 입국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1277년(충렬왕 3) 원나라에서 돌아와, 세조의 명으로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백성을 징발하여 해마다 고려의 인삼을 세조에게 바쳤다. 이때 인삼이 조금이라도 썩고 상한 것이 있거나 그 지방에서 나지 않아 제때에 바치지 못하면, 곧 은(銀)이나 화폐로 징수하여 사리를 꾀하는 등 민폐를 많이 끼쳤으므로 원성이 높았다. 조윤통은 본래 고려의 인삼을 원나라에 팔았던 상인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원나라 세조에게 인삼을 바친 것은 대원무역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충렬왕이 장순룡(張舜龍)을 시켜 세조에게 이를 그만두도록 주청하기도 하였다. 1279년 상장군(上將軍)으로 원나라에 다녀와서 세조의 명으로 동계(東界)의 응방(鷹坊)을 관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여러 번 원나라에 다녀와서 원의 중서성(中書省)으로부터 담선법회(談禪法會)의 복설(復設)을 허가받았다.

1283년 왕의 총신 염승익(廉承益)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윤돈(尹敦)과 오숙부(吳叔富)를 왕에게 고하여 섬으로 유배하게 하였으며, 이 해에 호군(護軍)으로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현학금(玄鶴琴)에도 능하여 별조(別調)를 남겼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간섭기 대원무역: 『노걸대』를 중심으로」(위은숙, 『지역과 역사』4, 부산경남역사연구소, 1997)
「여·원무역의 성격」(전해종, 『동양사학연구』12·13, 1978)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