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신문왕의 처음 왕비는 김흠돌(金欽突)의 딸이었으나, 681년(신문왕 1) 8월 김흠돌이 모반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왕비도 죄를 입고 궁에서 쫓겨났다.
그리하여 신문왕은 683년 2월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비로 삼고자 5월 7일에 먼저 이찬(伊飡) 문영(文潁)과 개원(愷元)을 김흠운의 집으로 보내 부인을 책봉하였다.
같은 날 묘시(卯時)에 좌야·대상(大常)·손문(孫文)·길숙(吉叔) 등이 왕명을 받고 각기 처랑(妻娘)과 급량부(及梁部)·사량부(沙梁部)의 부인 각 30인을 데리고 부인을 궁 안으로 맞이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