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두가 나직하고 아래보다 위가 약간 벌어졌으며 뚜껑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각종 유기가 만들어져 실생활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이다. 주발이 밥그릇으로 궁중과 반가(양반집)에서 쓰인 것도 이때부터이다.
고려시대의 식기로 추측되는 현존 놋그릇을 보면 동체가 아주 짧으며 대개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방짜기법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금의 주발형태가 만들어져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서민들도 여기에 음식을 담아먹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제영(諸營) 각사(各司)에 일정수의 유기장인을 예속시켰다. 민간에도 많은 유기장들이 있어 주발을 다량으로 만들어냈다.
각 지방에는 ‘놋점’이라는 유기점이 따로 있어 주발을 비롯한 각종 유기를 다룸으로써 일반서민들은 이곳에서 주발을 구입하였다.
반면에 반가나 부호들은 주발을 맞추어서 썼다. 특히 안성의 맞춤유기가 유명하여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안성에서 만든 주발이 유명하였던 까닭은 주발이 작고 아담할 뿐만 아니라 견고하고 재질이 좋아 광채가 은은하였기 때문이다.
대가족제도였던 예전에는 위로는 집안어른의 진지 그릇에서부터 아래로는 손자·손녀의 밥그릇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발이 찬탁에 비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가을바람이 불 무렵이면 여름에 쓰던 자기 밥그릇 대신 찬탁에 넣어두었던 주발을 꺼내, 광이 나도록 닦는 일이 커다란 집안행사 중의 하나였다. 주발을 닦을 때는 집안의 여인들이 총동원되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쭉 둘러앉아, 곱게 갈아 체에 친 기왓장 가루를 수세미에 묻혀 닦았다.
요즈음에는 생활환경이나 생활양식이 서구화되고, 또 여러 가지 새롭고 편리한 식기가 많이 등장함으로써 주발이 실생활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