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양우는 조선 전기 중종~명종 대 질정관, 전적, 어전통사를 역임하였고,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역관 임무를 수행한 문신이다. 중종 대 생원시와 진사시 문과에 모두 급제하였다. 스스로 한어를 공부하면서 전문성을 갖추게 되었고, 역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미천한 출신 때문에 명에 파견하는 질정관 임명에 사헌부에서 반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어 실력이 뛰어나고 관련 업무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질정관에 임명되었다. 문관 중에 한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소수의 인물이었으므로 사행 파견에 자주 참여하였다.
주양우(朱良佑)의 본관은 웅천(熊川), 자는 여익(汝翼)이다. 현재의 기록으로는 생몰년을 확인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주치형(朱致亨)이다. 부인은 이희청(李希淸)의 딸이다. 아들 주덕원(朱德元)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4년(중종 29)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다. 같은 해 시행되었던 식년시 문과에서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관력에 대한 기록이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 다만, 『 중종실록(中宗實錄)』에 주양우가 일찍부터 사역원(司譯院) 생도(生徒)가 되기를 스스로 희망하여 한어(漢語)를 공부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는 주양우가 본인의 의도에 따라 한어를 공부해 역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록이다.
또한, 사헌부에서 주양우의 출신이 미천하다는 점 때문에 사행의 질정관(質正官)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대한 사례도 확인된다. 당시 중종은 주양우의 출신이 미천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어에 능통하고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정승들의 의견으로 질정관으로 임명하였다는 전교를 내렸다. 주양우가 출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주요 관직보다는 한어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진로를 설정하였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주양우는 문관 중에 한어를 전공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행 파견 때 자주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중종 대 조정의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문관 중에서 한어가 능통한 인물로 주양우가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 때문에 주양우 이외의 젊은 문관에게 한어를 교육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