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출신. 6·25전쟁기인 1951년 3월 8일 소위로 해병대 수색소대장을 맡아 박지산을 수색·정찰하다가 북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진두태가 첫 전투에 참가한 것은 1949년 12월 말부터 실시된 이른바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이었다. 그가 ‘해병중의 해병’이라 불리게 된 것도 바로 이 토벌작전 때문이었다.
그는 유격대 병조장(兵曹長)으로서 1950년 3월 10일 한대악(漢大岳) 부근에서 김익태(金益泰) 일등병조(一等兵曹 : 상사)가 지휘하는 유격분대가 공비 40명을 만나 포위된 것을 구출하였다. 진두태와 그의 유격대가 공비들을 기습공격하여 공비 7명을 사살하고 김익태의 유격분대를 구출하였던 것이다.
제주도에서 6·25전쟁을 맞은 그는 1950년 7월 16일 군산·장항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7발의 총탄을 맞아 큰 부상을 입고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아군의 항공포격으로 주위가 어수선해지자 그 틈을 타 적진을 탈출하였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인천에 대기중인 부대로 복귀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미 전사처리되어 소위로 특진되어 있었다.
1950년 12월 중순경 진해로 복귀한 진두태 소위는 해병대의 중부전선 투입시 제3대대 수색소대장을 자원하였다. 수색소대장으로 나간 진두태는 박지산을 수색하여 적정을 수집하라는 임무를 수행키 위해 나갔다. 눈이 허리까지 차는 날이었다.
그곳에 탄피와 탄약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수색대를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다. 이를 모르고 접근한 진두태 수색소대장은 사방에서 나는 총성을 들었다.
이 때 진소위는 “전원후퇴,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만 하달하고 혼자서 수색대의 철수를 엄호했으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전사 후 충무무공훈장과 중위로 일계급 특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