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인접지역 고분군과 통합되어 사적 '진천 산수리와 삼용리 요지'라는 명칭으로 재지정되었다. 지정면적 3,432㎡. 1986년중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문화유적 조사에서 삼룡리 일대의 야산지대에 산재한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한남대학교에 의해 조사되었다. 1989년까지 5개 유적군에서 토기요지 13기와 토기제작을 위한 작업장으로 사용된 움집터 6기가 조사되었다.
조사된 토기요지는 청동기시대 무문토기가 경질(硬質)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함께 나오는 서기전 1세기, 즉 원삼국시대 초기부터 4세기 백제토기까지의 것이다. 요의 구조는 타원형 또는 장타원형의 소성실(燒成室) 앞에 아궁이의 바로 아래가 연소실(燃燒室)이 되는 수직식 연소실이 딸리고, 소성실 바닥이 16∼25°의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등요(登窯)들이다.
경질무문토기가 섞여나오는 원삼국시대 초기요는 전체 길이 4∼5m, 소성실 최대 너비 1.5m 내외의 소형으로, 요의 바닥과 벽은 지하에 설치되고 천장은 지상에 나온 반지하식이다.
그러나 이보다 시기가 내려오는 원삼국시대 후기와 백제토기요는, 요의 규모도 전체 길이 약 8m, 소성실 최대 너비 약 3.5m까지 커지고, 요의 설치 방법도 야산의 비탈 아래 지하에 굴을 파서 설치하는 지하굴식 요로 발전하고 있다.
이 요지들에서 생산된 타날문토기들의 유형은 회청색 경질토기를 비롯하여 회색계 연질토기, 흑색 연질토기 등의 환원염(還元焰) 소성토기와 산화염(酸化焰) 소성토기인 적갈색 연질토기로, 우리 나라 원삼국시대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유형들과 같다.
토기들은 아주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는데, 기형에 따라서는 점토에 가는 석립(石粒)을 섞은 것도 있다. 토기들은 처음 테쌓기로 형태를 만든 다음 물레 위에서 마무리 성형한 것으로, 대부분 특히 입술 부분에 물레자국이 있다. 몸통부에 승석문(繩蓆文) · 격자문(格子文) 등 타날문이 찍혀 있으나 소형토기에는 타날문이 찍히지 않은 것도 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보아 이곳 진천 삼룡리 토기요지군은 우리 나라 중부지방에 철기시대 타날문토기 제조기술이 도입될 당시인 초기부터 토기요가 자리잡기 시작하여,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된 대형 요지군이다. 이곳에 이와 같은 대형요지군이 자리잡게 된 것은 이 지역에 타날문토기의 태토(胎土)로 쓰이는 양질의 점토(粘土) 산지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이곳 요지군 가까이에 있는 미호천변(渼湖川邊) 일대에서 점토산지가 확인된 바 있다.
이 요지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최대 특징은 수직식 연소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수직식 연소실을 가지는 토기요가 중국 산시성(山西省) 양분현(襄汾縣) 대시유지(大柴遺址)에서 조사된 바 있고, 또한 토기 제작도구도 똑같은 것들이 출토되고 있어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산시성 대시유지요는 중국 전국시대 인문경도요(印文硬陶窯)로서, 우리 나라의 철기시대 타날문토기가 중국 전국시대의 인문경도 제작기술이 도입되어 형성된 것임을 이 삼룡리요지들은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