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三國遺事)』 권 2, 기이(紀異) 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 「처용가(處容歌)」에 의하면, 헌강왕(憲康王, 875∼886)이 개운포(開雲浦)에서 짙은 주5를 만나 길을 잃었을 때 ‘동해 용을 위해 주1를 하여 풀어야 한다’라는 일관(日官)의 말에 따라 근처에 주9를 세우도록 영을 내렸다. 그러자 운무는 씻은 듯이 개었고, 동해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와 임금의 덕을 찬양하여 춤과 음악을 바쳤다. 용의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정을 보좌하니,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미녀로 아내를 삼아 주고, 주2의 직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를 흠모한 역신(疫神)이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몰래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고 있었다. 마침 집에 돌아온 처용이 잠자리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이처럼 노여움을 보이지 않은 처용의 태도에 감동한 역신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는 처용의 주6을 보아도 그곳을 멀리 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당시에 처용이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경명기월랑(東京明期月良) : 동경 밝은 달에, 야입이유행여가(夜入伊遊行如可) : 밤들어 노닐다가, 입량사침의견곤(入良沙寢矣見昆) :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각오이사시량라(脚烏伊四是良羅). : 다리가 넷이러라. 이힐은오하어질고(二肹隠吾下扵叱古) : 둘은 내 것이고, 이힐은수지하언고(二肹隠誰支下焉古). : 둘은 뉘 것인고. 본의오하시여마어은(本矣吾下是如馬扵隠) : 본디는 내 것이다마는, 탈질량을하여위리고(奪叱良乙何如爲理古). : 앗은 것을 어찌할꼬.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5년(879) 3월조에 의하면 왕이 나라 동쪽의 주4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나와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도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은 산과 바다의 정령들이라고 여겼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 주11 권 25에는 위 『삼국사기』의 처용 고사와 관련하여 후대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하며, 이제현(李齊賢)은 이를 한시를 지어 남겼다. 이제현 시의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신라석일처용옹(新羅昔日處容翁). : 옛날 신라에 처용이라는 늙은이는, 현설래종벽해중(見說來從碧海中) : 푸른 바다에서 왔다고 하네, 패치정순가야월(貝齒頳唇歌夜月) : 하얀 이[貝齒]와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면서, 연견자수무춘풍(鳶肩紫袖舞春風). : 치올라간 어깨와 자줏빛 소매로 봄바람 속에서 춤을 추네.
조선 성종 24년(1493) 『악학궤범』에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정재를 시작하기 전에 「처용만기」의 연주 이후 주12 16인이 주13과 엽의 형식으로 된 긴 「처용가」를 부른다. 이 노래가 끝나고 주3가 시작된다. 이 곡은 조선시대에 새롭게 창작된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전하는 처용가의 노래 외에 고려시대에 새롭게 지어진 처용가의 노래와 처용 잡희, 처용 정재가 전한다.
「처용(가)」로는 『삼국사기』와 『고려사』 및 『악학궤범』에 각각 세가지 다른 노래가 전한다. 「처용(희)」는 『삼국유사』 권 2, 기이 2 ‘처용랑 망해사’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5년(879) 3월조에 의하면 왕 앞 4명의 선인이 나타난 춤을 추었다는 내용이 전하고, 『고려사』에는 세가 권 23에 복야에 송경인이 처용희를 잘한다거나, 권 36 충혜왕(후) 4년 8월 원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어떤 사람이 처용희를 추었다든가, 세가 열전 권 48 우왕(禑王) 11년 6월 왕이 화원에서 처용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신라시대에 발생한 처용을 주제로 한 설화는 「처용가」를 비롯해 「처용희」와 「오방처용무」로 양식화되고 이를 주제로 한 연말 궁중 예연인 「창경궁관처용」 및 「창덕궁관처용」이 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자생의 콘텐츠가 시대에 따라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볼 수 있으며, 그 중 조선 세종 무렵 양식화된 「오방처용무」는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고유한 궁중 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