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석재는 화강암으로, 개석은 없고 네모난 대석(臺石)과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 앞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되었다.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문인(門人)인 희진(希進)이 세우고, 각자의 이름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1394년(태조 3)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보각국사의 이름은 혼수(混修),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속성은 조씨, 풍양현 사람이며, 보각국사와 탑명인 정혜원융은 시호임이 나타나 있다. 이밖에 보각국사가 1320년(충숙왕 7)에 출생하여 계송(繼松)에게 법을 받고, 1332년(충혜왕 2)에 승과에 급제한 뒤, 1370년(공민왕 19)에는 공부선장(工夫選長)에 뽑혔으나 거절하였고, 그 뒤 왕의 청으로 내불당(內佛堂)에서 왕에게 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또 1383년(우왕 9)에 국사가 되고 73세에 입적한 일, 그리고 국사의 덕과 지혜는 나라에서 추앙할 만하여 왕명으로 비를 세운다는 명문이 적혀 있다. 비음에는 문도와 소문도의 명단을 새겨 넣었다.
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전 조선시대에 걸쳐서도 이 비에 필적할 만한 글씨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