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의 국문 필사본이다. 작품의 머리에 ‘최호양문녹 권지단’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권 분량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다. 18면까지 작품이 계속되다가 중도에 그치고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을 필사한 것이 연결되어 있다.
이본으로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 「최호양문록」 1책이 있으며, 이 책의 필사 연대는 1874년이다. 또다른 이본으로 구활자본 「월영낭자전(月英娘子傳)」있다. 현재까지 보고된 이본은 22종에 이른다. 이본 수량으로 볼 때, 조선시대 상당히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보인다.
최씨와 호씨 양 가문의 남녀 주인공이 인연을 맺고 조정을 무대로 음모와 복수를 벌이는 가문소설의 한 작품이다.
송나라 때 소주 사람 최현은 한림학사, 간의태우를 거치고 이부상서를 겸했는데 나이 30에 아들 희성을 낳는다. 희성은 7, 8삭에 말을 하고 걸음을 옮겼으나, 3세가 되어도 글을 배우지 않았다. 5, 6세에 최 공이 글을 가르치려 하니 입을 닫았다. 최 공이 노하여 엄히 경계하였으나, 희성은 “후일 과장에 나아가 벼슬하여 육경재상에 오르고 월궁항아를 가리어 결혼할 것이라.”라고 대답하니, 최 공이 희성을 어루만지고 희성에게 글 가르치는 것을 그친다.
이때 병부시랑 호원이 한 딸을 두어 이름을 ‘월영’, 자를 '운빙'이라 지었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3세에 경서에 능통하고 예악을 알아 부모가 애중히 여긴다.
최현과 호원은 사생붕우로서, 하루는 호원이 최현의 집에 가 술을 나누다가 희성(당시 9세)의 풍채와 기상을 보고 운빙(당시 6세)의 짝이라 생각하여 구혼한다. 최현이 승락하였고, 서찰과 희성의 옥상장도, 운빙의 월기탄을 교환하여 신물로 삼는다.
이때 조정에서는 간신 여희가 정사를 어지럽혀 충신을 모함한다. 간신 연쾌와 더불어 호원을 모함하여 징소하니, 호원이 일이 되어가는 형세를 짐작하고 유서를 써서 부인과 여아에게 주고 작별한다. 그러나 연쾌가 호원을 가두고 엄히 국문하자 호원은 불복하다가 매를 맞고 죽는다. 부인과 여아가 애통해 하는 중에 최현이 찾아와 상사를 주관한다.
부인은 상복을 입고 유서를 써서 여아에게 주고는 궐문에 나아가 자살한다. 호 소저가 어머니의 시신을 모셔 오니, 최현이 찾아와 “복수를 생각하여 몸을 버리지 말고 희성과의 약속을 잊지 말라.”라고 당부한다.
고향으로 내려가 어버이의 시신을 선영에 모시고 삼년상을 마친다. 이미 집안의 재산은 탕진되었으나 호 소저는 비단을 짜고 수를 놓아 부모의 제사를 극진히 받든다.
이때 고을의 위 자사가 마음이 패려하여 아내 영씨를 내치고 재취를 구하던 중 호 소저의 재색을 소문으로 듣고 유모에게 구혼하나, 호 소저가 거절하자 서모 경씨를 다시 보내어 소저를 타이르려 한다. 호 소저가 꾸짖고 경씨를 내치니 위 자사는 “일봉 서신과 무사로써 겁측하리라.” 하고 최가에서 보내는 거짓 서신을 호 소저에게 보낸다.
「최호양문록」 전 · 후반부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조선 후기 쟁총형 가정 소설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며 전반부는 혼사 장애, 후반부는 쟁총을 다룬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구조는 후반부 처처 간의 쟁총이다. 동시에 「최호양문록」은 당시 가문소설의 영향을 일부 수용하였다. 조선 후기 가정 소설의 갈등 구조에 기반을 두면서도, ‘양문록’이라는 표제, 가문소설에 나타나는 자손의 번창, 늑혼 모티프 등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다양한 이본이 전한다. 일부 이본에서는 군담이 대폭 축소되는 경향이 나타나며, 군담 대신 혼사 장애담이나 애정담이 확장되어 나타난다. 이는 여성 향유층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