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1796년 내각(內閣:규장각)에게 ≪통감강목사정전훈의 通鑑綱目思政殿訓義≫의 예를 본떠서 ≪춘추좌전 春秋左傳≫을 편성하고, 새로 인쇄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경(經)의 강(綱)에 해당하는 큰 글자는 동지돈녕부사 조윤형(曺允亨)과 인천부사 황운조(黃運祚)가 자본(字本)을 써서 만든 목활자를 사용하고, 전(傳)의 목(目)에 해당하는 중간 글자와 그 세주(細註)의 작은 글자는 정유자(丁酉字)로 찍어서 다음해에 진상하였다.
이 때 이 일에 관여한 이들이 각각 포상되었는데, 특히 조윤형과 황운조는 경문을 정성껏 쓴 공로로 가자(加資:품계를 올리는 일)되었다. ≪판당고 板堂考≫의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의하면, 이 춘추강자는 모두 5,260개인데, 그 중 같은 글자의 활자이면서도 좀 넓적한 것이 황운조의 필체이다.
정조는 인진활자본(印進活字本)을 춘추관 등에 간직하게 하고 감독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이를 번각하여 영남과 호남의 두 도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였다.
≪판당고≫에 의하면, 1798년에 황필본(黃筆本), 1799년에 조필본(曺筆本)이 판각되었다. 그 판수는 각각 457판이었다. 그런데 이 활자의 고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후지다(藤田亮策)는 ‘綱’자를 ‘鋼’자로 오인하여 철활자라 하였고, 어떤 이는 그 복각본만을 보고 목판이라 하였으나 각각 착각임이 입증되었다.
또 황필본과 조필본별로 춘추강자를 목판에 각각 새긴 다음, 목과 세주가 위치하는 곳을 파서 정유자를 식자하여 찍어낸 것이라고도 하나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춘추강자가 나무로 만든 활자이나, 그 제작에서는 몇 자씩 연각(連刻)하여 식자한 것이라 주장하는가 하면, 한 자 한 자 떨어진 낱개의 활자를 만들어 활자의 위와 아래쪽을 깎아 맞추어 식자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자는 윗글자의 아래획과 아랫글자의 윗획이 서로 물리고 있는 데에서 나온 견해이고, 후자는 윗글자와 아랫글자의 높고 낮음이 달라 먹이 많이 묻고 덜 묻는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 나온 견해이다.
특히, 후자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1773년(영조 49)에 ≪자치통감강목속편 資治通鑑綱目續編≫ 중 강의 큰 글자를 하나하나 나무에 새겨 식자하여 찍어낸 목활자본의 경우와 그 조건이 비슷하고, 또 실제 사용된 활자 수가 ≪판당고≫에 적혀 있는 활자 수와 일치되는 점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출방법이다.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