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도(春花圖) 또는 운우도(雲雨圖)라고도 하였으며, 중국에서는 주로 춘궁화(春宮畫)라고 불렀다. ‘남녀교합지상(男女交合之狀)’이나 ‘남녀상교지형(男女相交之形)’을 노골적이고 선정적으로 묘사하여 춘흥을 즐기거나 성욕을 촉진시키는 최음(催淫)을 목적으로 그려졌다. 채색과 담채를 사용하여 비교적 사실적으로 다루어졌으며, 판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서기전 2세기경 한대(漢代)의 재상 진평(陳平)과 서기전 1세기경의 광천왕(廣川王)에 의하여 향락용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당대(唐代)에 창가(娼家)의 머리 병풍용으로 많이 그려졌다. 원대(元代)에는 몽고풍의 춘화가 유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던 것은 호색 문화(好色文化)가 크게 성행하였던 명대(明代) 후반부터였다.
우리나라는, 조선 영조 때 현감을 지낸 박양한(朴亮漢)의 『매옹한록(梅翁閑錄)』에 의하면, 조선 중기인 인조 연간에 상아 조각품의 형태로 처음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나라 왕실과의 밀접하였던 관계 등을 고려하면 늦어도 고려 후기부터는 왕실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격적인 유입은 소설류를 비롯하여 명·청대의 호색 문화가 들어오는 조선 후기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강한 유교적인 윤리 의식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크게 성행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의 유품들은 모두 낙관을 하지 않은 작가 미상으로 묘사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성기 부분의 과장과 같은 노골적인 장면도 드문 편이다.
대부분 19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 등 영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후기의 유품은 상당히 드물고,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유입되었던 일본 춘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