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은 4음보 1행을 기준으로 모두 82행이다. 북새(北塞: 함경도) 지방의 출행(出行)을 읊은 노래이다.
작자가 56세 되던 1616년(광해군 8) 가을에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떠날 때, 족형(族兄) 탁(倬)으로부터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과 같은 가사를 지어오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에서 경성까지 가는 도중의 지리 · 풍물과 그곳 생활의 애환을 읊은 가사로, 제작 연대는 부임하던 이듬해인 1617년일 가능성이 가장 많으며, 그곳 체류 중(1616∼1621)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
서(序)와 함께 『이재영언(頤齋詠言)』에 실려 있다. 서두 부분을 보면, 떠날 때의 심경을 “셔ᄉᆡᆼ(書生) ᄉᆞ업(事業)은 한묵(翰墨)인가 너기더니/ᄇᆡᆨ슈님변(白首臨邊)이 진실노 의외(意外)로다/인졍젼(仁政殿) ᄇᆡᄉᆞ(拜辭)ᄒᆞ고 칼흘 집고 도라셔니/만리관하(萬里關河)의 일신(一身)을 다 닛괘라.”라 하여 비장미(悲壯美)를 띠고 있으며, 가사의 전반부는 서울에서 경성까지의 2,000여 리에 걸친 한달 이상의 긴 여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작자의 감회도 곁들여 있다.
“옥져산하(沃沮山河)를 면면(面面)히 도라보니/쳔년풍패(千年豊沛)예 울총가긔(鬱葱佳氣)ᄂᆞᆫ 어제론덧 ᄒᆞ여셰라/함관녕(咸關嶺) 져문 날의 ᄆᆞᆯ은 어이 병이 든고/만면풍사(滿面風沙)의 갈 길히 머러셰라.” 육진(六鎭)을 개척한 윤관(尹瓘)과 김종서(金宗瑞)의 빛나는 위훈을 높이 추모하는 한편,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조정관리들의 부조리를 비판하여, “ㅤㅈㅕㄱ셜마쳔(積雪磨天 : 마천령)을 허위허위 너머드니/진관(秦關)이 어듸고 ㅤㅊㅛㄱ잔(屬棧)이 여긔로다/셩딘셜딘(城津設鎭)이 형셰(形勢)ᄂᆞᆫ 됴커니와/난후변민(亂後邊民)이 고혈(膏血)이 ᄆᆞᆯ나시니/묘당(廟堂) 육식(肉食 : 고관은 아ᄂᆞᆫ가 모ᄅᆞᄂᆞᆫ가.”라고 읊고 있다.
험준한 사령(四嶺)을 넘어 천신만고로 목적지에 도착한 작자는 노래의 후반부에서 한가할 때 봄놀이 하는 모습도 그리고 있다.
“원문(轅門)이 무ᄉᆞ(無事)ᄒᆞ고 막부(幕府)ㅣ 한가(閑暇)ᄒᆞᆫ 제/동산(東山) 휴기(携妓)ᄒᆞ고 북ᄒᆡ준(北海樽)을 거훌우랴/연화삼월(烟花三月)의 원슈ᄃᆡ(元帥臺)예 올나가니/츈풍이탕(春風駘蕩)ᄒᆞ야 슉경(淑景)을 부처내니/만슈천림(萬樹千林)은 홍금(紅錦)이 되여 잇고/운도셜랑(雲濤雪浪)은 하ᄂᆞᆯ을 ᄀᆞ을 사마/분박뇌졍(噴薄雷霆) ᄒᆞ야 대(臺) 압희 물너디니.”
그러나 이러한 행락은 작자에게 즐거움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가져다 주고 있음이 노래의 뒷부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잔 ᄀᆞᄃᆞᆨ 부어 이 시름 닛댜 ᄒᆞ니/동명(東溟)을 다 퍼 내다 이 내시름 어이ᄒᆞᆯ고.” 함경도 지방에 대한 기행가사로는 첫 작품이며 우수한 작품으로, 국문학사상 기행가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