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打作)’·‘병작(倂作)’·‘반분(半分)’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부터 행해진 병작반수의 관행으로, 대부분 생산량의 2분의 1이었다. 수리시설이 미비하여 생산이 불안정했던 논에서는 타조법이 합리적인 관행이었으므로 전국 각지에 보편화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부터 호남·호서 지방에서는 정조법(定租法)으로 변하였다.
1930년 소작 관행 중 44.4%, 1974년 41.7%가 타조법이었다. 또 분배형식에 따라 곡분(穀分)·속분(束分)·휴분(畦分)으로 구분되는데, 곡분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서부·남부·중부 지방에서 행해졌고, 속분은 강원도 산간지대와 함경도지방에서 행해졌으며, 또 휴분도 이곳에서 약간씩 발견되었다.
소작인은 보통 비료·종자·농기구를 전담하였고, 세금은 조선시대에는 중부 이남지방에서는 소작인이, 북부지방에서는 지주가 부담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둘이 반분하든지 지주가 전담하였다. 수확은 지주나 마름이 정한 날짜에 그들의 입회하에 하였으며, 소작료는 완전 현물로 그 자리에서 지주에게 분배되었다.
또 소작인은 소작료를 지정된 장소까지 운반해야 하는 책임을 졌다. 지주가 종자를 부담했다면 짚도 가져갈 수 있었다. 재해를 만나 평년에 비해 7할 이상 감수(減收)했을 때는 소작료를 전면하거나 감면하였다.
타조법은 풍흉에 따라 소작료가 결정되었으므로, 소작인 측에서는 흉년에는 유리하나 풍년에는 손해가 많았다. 또한, 분배율이 미리 결정되었으므로 소작인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생산물의 일부를 빼돌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주는 종자 선택·경작 근무·수확·운반·토지개량을 하는 데 되도록이면 감독과 간섭을 하려고 하였다.
이럴 경우 자연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경제외적 강제가 심해졌고, 소작인들도 자유로운 농업 경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산의욕을 보이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