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당초문(葡萄唐草文)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8세기경으로서 당대(唐代)에 인도의 금공미술(金工美術)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당대에는 서역(西域) 유물이 다량 유입되었는데, 특히 견직물에 나타나는 포도 금문(葡萄錦文)에는 포도 넝쿨 사이에 천신(天神)으로 보이는 괴인물(怪人物)이 보인다. 그 인물의 묘사는 분명히 서역인으로 볼 수 있으니, 이때에는 양귀비(楊貴妃)를 위하여 많은 직금공(織錦工)과 자수공(刺繡工)을 서역에서 징용하였다고 한다. 그 문양은 역시 당대의 해수 포도문경(海獸葡萄文鏡)에서도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러한 당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와당(瓦當)이나 전(塼)의 문양에 응용되어 있다. 경주 부근의 사지(寺址)에서 발견된 다수의 와당에서 포도 당초문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형식은 이전의 형식과는 달리 매우 사실적인 포도 넝쿨이 묘사된 것이다. 또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된 많은 와당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의장 문양의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
고려시대 도자기에서는 12세기 전반경에 많이 쓰였는데 포도 넝쿨 사이에 동자(童子)가 매달려 노는 모습 등 민화적(民畫的) 풍취를 준다. 그러한 것은 당시 중국 원대(元代)에 유행하던 백동자도(百童子圖)에서 착안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의미는 장수(長壽)·다남(多男)·다복(多福)의 삼다사상(三多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청화(靑華)·철화(鐵畫)·진사(辰砂)로 그려진 회화적(繪畫的)인 포도문이 성행되었으며, 대개 사실풍으로 시문되고 있으나 간혹 극히 추상화된 포도문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