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이후 평양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주요섭(朱耀燮)·원보훈(元甫勳)·길진경(吉鎭京)·김건형(金建亨)·이태서(李泰瑞) 등 숭덕학교(崇德學校) 졸업생 및 재학생들이 독립운동 소식을 평양시민과 학생들에게 전하여 독립의지를 고취하고, 만세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조직하였다.
등사판을 차려놓고 『독립운동뉴우스』를 발간, 배포하는 한편, 상해(上海)에서 들여온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등사,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들 나이가 모두 20세 이하여서 평양형무소 유년감(幼年監)에서 복역하고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