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관은 관인이 처하고 있는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붙을 수 있다. 한량품관(閑良品官) · 전함품관(前銜品官) · 재외품관(在外品官) · 부경품관(赴京品官) · 도내대소품관(道內大小品官) · 거경품관(居京品官) · 수전품관(受田品官) · 유향품관(留鄕品官) · 토성품관(土姓品官) 등이 그것이다.
한량품관은 한산상태(閑散狀態)에 있는 품관이고, 전함품관은 전함관(前銜官), 즉 전직 관료이며, 부경 · 거경 · 수전품관은 군전(軍田)이나 과전(科田)을 받고 거경시위(居京侍衛)하는 품관이다. 재외 · 도내대소 · 유향 · 토성품관은 거경 시위할 대상자로서 아직 지방에 머물러 있거나 거경 시위 제도가 완화된 뒤 지방에 머물러 있던 품관들을 말한다.
품관들은 고려시대부터 토착사회의 지배자로서 군림해왔다. 이들은 재지지주(在地地主)로서 강력한 경제적 부(富)를 기반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부류들이었다. 따라서 당장은 관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미 관직을 가지고 있었거나 언젠가는 관직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언제나 중앙 정계의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국가에서도 이들의 향배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건국 초기에 재지품관들을 국가에서 강제로 거경시위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의 품관 중에는 신왕조건국을 찬성하지 않는 불복신(不服臣)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품관들은 태도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서울로 불러 올려 거경시위케 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을 기하고자 한 것이다.
품관과 향리는 고려시대부터 지방토착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관품이나 관직을 받은 바 있는 품관들은 점차 스스로를 향리와 구별하고자 하였다. 품관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높아져가는 데 반해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품관군(品官群)과 향리군(鄕吏群)은 토성층(土姓層)과 속성층(續姓層)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리고 향리들에게 더 이상 관품을 주지 않았다. 이 점은 서리(胥吏)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의 품관은 양반층으로만 구성되었다. 즉 고려시대의 품관에는 양반 뿐만 아니라 이서(吏胥)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품관에는 양반만 포함되고 이서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품관들은 지방 사회의 지배자로서 양반 국가의 세력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이 지방마다 유향소를 설치해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 세력을 견제하였던 것은 좋은 예이다.
품관은 본래 유품관(流品官)의 준말이고, 유품관이란 유품에 속하는 관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유품이란 문 · 무산계를 받은 양반 · 기술관 · 경아전(上級胥吏=錄事)을 포함하는 관리들을 의미한다. 녹사(錄事)도 이서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양반의 음직(蔭職)으로 활용되었다.
1392년에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양반직 · 기술직 · 녹사뿐만 아니라 그러한 직을 받을 수 있는 산관을 가진 사람들까지 포함된다고 하였다. 토관(土官) · 향리 · 내시(內侍)와 잡직을 받는 사람은 유품에서 제외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