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84면. 저자는 충청도 공주시공암(孔巖)에 살았던 광산 김씨의 한 사람이다. 1894년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충남 서부 지역에서 저자가 겪은 동학농민전쟁 체험담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향촌사회의 동향, 그리고 관군과의 전투 상황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그러나 일기체가 아니고 전체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 회고록 형식이다. 집필한 동기는 착한 일을 하면 난세에도 성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된 때는 1893년이며, 예산과 덕산 등지의 동학 지도자 이름 등을 밝혔다. 성환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청국군 패잔병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을 보고, 동학이 화근이라고 질책하며 개항 이후 서양 제국과 문물의 침투를 비판하는 보수 유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이미 6월에 기포한 이 지역 동학농민군들이 평소 원한이 있었던 양반들에게 보복을 많이 하였던 일, 가족들과 피난길에 나설 수밖에 없던 사정, 피난의 고통, 동학농민군의 행패, 체포 당할 위기, 친지들의 동향 등을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또한 자신들 일족이 동학농민군에게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이유와 그 때문에 성명을 바꿔야 했던 경위를 길게 썼다.
필자는 양반 유생의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이 무식하고, 심하게 행패를 부리고, 외세를 불러들이고, 대다수가 급조된 도인이기 때문에 곧 무너질 것이라는 등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내용 가운데는 동학농민군들의 의식, 태도, 종교적 행위, 지도자와 조직체계, 유행했던 비결(秘訣) 등을 말해 주는 것이 많다.
특히 필자는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신분적인 것으로 파악해 상민의 양반에 대한 대항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양반들이 유회(儒會)를 설치하려고 했던 시도, 홍주목사 이승우의 동학농민군 탄압,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홍주 등지의 전투, 피난민과 전장의 참상, 남학(南學)의 등장, 관청의 지시에 따른 유회 설치와 활동을 생생하게 상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