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궁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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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
개념
향교의 재정 · 인력의 기반이 되던 마을. 향교말 · 교촌 · 교궁촌.
이칭
이칭
향교말, 교촌(校村), 교궁촌(校宮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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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향교의 재정 · 인력의 기반이 되던 마을. 향교말 · 교촌 · 교궁촌.
내용

‘향교말’·‘교촌(校村)’·‘교궁촌(校宮村)’이라고도 한다. 향교는 통상 관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읍내에 위치하였고, 학궁촌도 향교 주변의 몇 개 마을이었다. 학궁촌은 성균관의 반촌의 예에 따라서 관이 지정한 것으로 보아 향교가 설치될 때부터 설정되었을 것이다.

향교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시대에는 위전(位田), 조선시대에는 5∼10결의 학전(學田)을 지급하고 전세를 면제해 주었고, 교노(校奴)도 지급하였다. 그 학전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일부는 학궁촌의 주민이 경작하였다. 그런데 조선 성종 이후 교육기관으로서의 향교의 비중이 약화되면서 학전도 축소되었고, 교노도 감소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학궁촌이 향교를 운영하는 데 상당히 중요시되었다.

학궁촌의 주민들은 향교의 수직(守直)을 비롯하여 청소·나무하기·군불때기 등과 같은 각종 잡역을 담당하였고, 봄·가을의 석전(釋奠: 공자에게 제사지내는 의식), 기우제, 성황제 등의 제사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봉사의 대가로 학궁촌은 완문(完文: 부동산이나 세금 등의 처분에 관하여 발급하던 증명)을 받아 제역촌(除役村)이 되어 연호잡역(烟戶雜役: 민가의 각 戶에 과하던 여러 가지 부역)을 면제받았고, 군역(軍役)까지도 피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학궁촌은 지방 재정에 큰 결손을 가져오기도 했으므로 지방에 따라서는 제역되지 않은 예도 있었다.

또한, 일종의 학궁촌이라고 할 수 있는 향교 계방촌(契房村)이 있었다. 이 계방촌은 향교의 주변 마을이 아니라 외촌(外村)인 경우가 많았다. 계방촌은 향교에 일정한 금전을 내고 대신 잡역·군역을 면제받았고, 교노들의 동령(動令)이나 침탈을 면할 수 있었다. 계방촌이 모든 소임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침탈을 당했을 경우에는 향교의 재임(齋任)이 수령에게 보고하여 해결해 주었다.

이와 같이 제역촌으로서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았던 학궁촌은 다른 마을에 비해 생활 형편이 좋았고, 관리들의 간섭을 적게 받았으므로 은결(隱結)과 한정(閑丁: 國役에 나가지 않는 장정)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점이 오히려 관리들의 탐학과 부정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조선후기 향교의 재정적기반」(강대민, 『부산사총』2, 부산산업대학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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