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병거부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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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943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강제 징병에 저항한 학도지원병 거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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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3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강제 징병에 저항한 학도지원병 거부 운동.
내용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자, ‘전시교육’이라 하여 학생을 각종의 노역에 동원시켰다.

그리고 법문계(法文系)에 대해 병역 유예를 철폐시키던 일제는, 1943년 10월 20일 이른바 ‘조선인학도육군특별지원병제도(朝鮮人學徒陸軍特別志願兵制度)’를 공포하였다.

학도지원병제는 표면으로는 자의에 의한 지원이라 하였으나 총독부는 해당 학교에 대해 갖은 수법으로 독려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명망이 높은 김성수(金性洙)·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안재홍(安在鴻)·이광수(李光洙)·유진오(兪鎭午) 등을 강압으로 혹은 명의(名義)를 도용하여,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每日申報》 등에 학생 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조선인 학생들에 대해서는 최남선(崔南善) 등을 내세워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강연을 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고국의 지방관헌들에게 가족을 협박하거나 명의를 도용하여 유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전보를 치도록 하는 등 갖은 강압과 회유 수단을 동원하였다.

이에 조선인 학병 해당자들은 전쟁의 광기에 날뛰던 일제 당국에 대해 여러 형태로 저항하였다. 사례를 보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대 출신의 이광림(李光林) 등 60여 명의 함경남도 북청지방 학병들은 일본군에 입대하느니 차라리 옥살이를 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경찰관서를 때려부수기도 하였다.

또한 보성전문대학 상과 출신의 서재균(徐載均)은 같은 학병인 최이권(崔二權)·권중혁(權重赫)·이석구(李奭球)·배상동(裵相東)·양현식(梁鉉植) 등과 함께, 1943년 11월 술에 만취하여 순사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언과 폭행을 가하고 재동파출소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경찰은 학도지원자들이라는 이유로 문책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거부운동은 전국에 걸쳐 일어나 일제 기관에 도전하고 저항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일어난 집단적인 학병거부운동은 서울에서 전개되었다.

보성전문대학의 이철승(李哲承)을 비롯한 법과의 유정담(兪鼎澹)·손광수(孫光秀), 상과의 윤원구(尹元求)·박석규(朴錫圭)·오세정(吳世挺) 및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李赫基) 등이 주동이 되어, 서울 시내 각 학교의 대표들과 한달 동안 학병거부운동에 대한 투쟁 방안을 협의하였다.

데모를 비롯한 여러 방안이 거론되었으나, 당시의 상황으로 실천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결국 학생 대표 20여 명이 학병거부 이유서를 작성, 서명 날인하여 조선 총독에게 우송하기로 하였다.

당시 경찰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주동자들을 모두 검거하려고 하였으나, 총독 고이소(小磯國昭)는 경찰의 검거 계획을 중단시키고 비서를 시켜 주동 학생들과 면담을 요청하였다.

이때 약 12∼13명의 학생들은 총독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총독 관저에서 약 3시간 동안 학도병지원제와 대한식민정책의 부당성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에 고이소 총독은 미국·영국 등을 격멸하여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과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실천을 책임질 것이니, 학병 출정을 요망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러한 총독의 태도에 반발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 학생들은 계속하여 지원서를 내지 않자 이번에는 경찰이 이들을 구속하였으나 역시 총독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이렇듯 학병거부운동으로 더 이상의 진척을 보이지 않자, 총독이 직접 나서 초고압 정책으로 학병모집을 단행하였다.

1944년 1월 19일∼20일에 학병 적격자 7,200여 명 가운데, 한국 내 학생 959명(적격자 1,000명), 귀국 중인 일본 유학생 1,431명(적격자 1,529명), 일본에 남아 있는 유학생 719명(적격자 약 1,400명), 9월 단축 졸업생 941명(적격자 1,574명), 취직중인 졸업생(적격자 약 700명) 등 총 4, 385명이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강제로 입대하였다.

전국 도처에서 학병을 위해 군수·서장·지방유지 등이 행한 축사는 이 나라의 젊고 발랄한 지식인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조사(弔辭)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처럼 강제로 입대한 조선인 학병들은 일본군에 입대하고도 기회만 있으면 탈출하였고, 특히 중국에서는 충칭임시정부(重慶臨時政府)가 이끄는 광복군을 찾아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청춘만장(靑春輓章)』(1·20동지회중앙본부, 1972)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정세현, 일지사, 1975)
『학생운동』(정세현, 민족문화협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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