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전위동맹은 1926년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학생혁명당(學生革命黨)의 후신으로 1929년 3월 하순에 개칭된 비밀결사이다.
학생전위동맹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29년 11월 7일부건(夫鍵)·권유근(權遺根) 등을 광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장석천(張錫天)·강영석(姜永錫) 등과 회합하고 광주사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검거당한 학생의 석방과 나아가서는 ‘조선독립’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우선 서울시내 각 중등학생을 움직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여세를 몰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같은 달 12일 광주학생들의 제2차 시위운동이 있은 뒤, 장석천·강영석 등은 경찰에 쫓겨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권유근·차재정(車載貞)·정종근(鄭鍾根)·곽양훈(郭良勳) 등 전위동맹 간부와 각 학교 학생대표들과 함께 서울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11월 중순경부터 11월 하순 사이에 차재정이 낸 인쇄비 70원으로 곽양훈이 격문 8,000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12월 2일 밤중을 이용, 중동학교·경성여자상업학교·동덕여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 수천매를 살포하였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권유근·정종근 등은 신용우(申用雨) 등과 협의, 격문 1,800매를 인쇄하여 같은 시각에 경신학교(儆新學校)·중동학교 등에 살포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은 종로서(鍾路署)에 수사총본부를 설치하고, 12월 4일 정오까지 각 사상단체·청년단체, 근우회(槿友會)의 간부와 학생 등 127명과 다음 날 아침 40여 명을 추가로 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