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본. 1915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출판하였다.
1915년 상해에서 간행된 초판본은 현재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46년삼호각(三乎閣)에서 출간한 책이 유포되고 있으며, 1975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동양학총서 제4집으로 간행한 『박은식전서』 3권 중 상권에 초판본이 그대로 영인, 수록되어 있다.
한국통사는 한 나라의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결코 망한 것이 아니라는 신념 아래,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서술된 것이다.
체재는 범례 · 목록 · 서 · 서언 · 삽화 · 제1편 2장 · 제2편 51장 · 제3편 61장 · 결론 · 후서 · 발 등으로 되어 있다. 삽화는 모두 12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1항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집자한 제사(題辭), 제2항은 백두산 천지, 제3항은 고적으로 신라태종묘비 등 12점, 제4항은 이순신(李舜臣)의 철갑구선(鐵甲龜船), 제5항은 금강산, 제6항은 궁전의 명소, 제7항은 서울의 명소, 제8항은 한국황실, 제9항은 순종, 제10항은 황실의장과 경내명소, 제11항은 을사조약 · 한일신협약 때의 한국대신 및 일본대표, 제12장은 을사조약 이후 순국한 인물 등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본문은 3편 114장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중요 부분은 각 장 뒷부분에 저자의 의견을 첨가하였다.
제1편은 서설편으로 지리와 역사의 대강을 적었다. 제1장은 한반도의 위치와 산천, 각 지방의 중요도시와 명승지 및 특산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장은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고종 즉위 전까지의 역사를 긍정적인 사실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제2편은 모두 51장으로 대원군의 섭정에서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제1∼10장에서는 대원군이 집정해 하야하기까지의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서술하였다.
즉, 대원군이 집정하게 된 경위와 경복궁 중건―서원 철폐―세제 개혁―국방대책과 풍속 교정―천주교 탄압―병인양요―신미양요―일본과의 통상교섭 거부―대원군의 하야 경위 등이 그 내용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대원군의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강화를 위한 내정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으로 한국이 중흥할 기회를 잃었다고 하면서 통사(痛史)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제11∼13장에서는 민씨정권에 의한 문호개방과 그에 따르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문호개방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부강해질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14∼17장에서는 임오군란과 그 결과로 일어난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 및 일본측과의 제물포조약 체결, 청일 양국의 군대주둔 문제에 관해, 제18장에서는 구미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관해 서술하였다.
제19∼25장에서는 갑신정변에서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난 때까지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갑신정변에서 일본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개화당이 성공해 계속 집권하면 한국이 지나치게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고 하였다.
제26∼44장은 동학혁명에서부터 청일전쟁 · 갑오개혁을 거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실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동학혁명의 책임은 정부에 있고, 갑오개혁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제45∼47장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의병운동을, 제48∼51장은 아관파천과 그 뒤에 일어난 열강의 이권쟁탈에 관한 내용이다.
제3편은 모두 61장으로 1898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때부터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제1장은 대한제국 성립 때의 국내사정과 독립협회 활동상을, 제2∼13장은 열강의 이권쟁탈,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서술하였다.
제14∼32장에서는 일제의 통신기관 강점, 일본선박의 내해항해의 자유권, 황무지개간 요구와 이의 반대운동, 압록강변의 삼림채벌권, 각 지방 광산채굴권 등의 장악 및 정치적으로 경찰권을 빼앗고 고문정치를 실시하는 과정과 러일전쟁과 강화조약 내용 등을 서술하였다.
제33∼44장은 일제의 침략 앞에 매국과 애국에 관계된 인물들을 서술하였으며, 을사조약 강제체결의 경위와 일본의 이권침탈 및 문화유산 약탈상 등을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기(李沂) · 나인영(羅寅永) · 오기호(吳基鎬) · 김인식(金寅植) 등의 일본천황에게 보낸 항의문, 『황성신문』의 폐간과 장지연(張志淵)의 언론활동, 이상설(李相卨) · 이유승(李裕承) · 안병찬(安秉瓚) · 조병세(趙秉世) · 민영환(閔泳煥) 등의 을사조약 반대운동과 민영환 · 조병세 · 홍만식(洪萬植) · 송병선(宋秉璿) · 이상철(李相哲) · 김봉학(金奉學) 등의 순국, 최익현(崔益鉉)의 격문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목적으로 이용한 한국인은 의친왕(義親王)이강(李堈), 영선군(永宣君)이준용(李埈鎔) 등 황족, 박영효(朴泳孝) 등 당시의 국사범, 송병준(宋秉濬) · 이용구(李容九) 등 일진회(一進會) 간부들이라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제45∼61장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국권상실,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내용을, 제45장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의 농토를 약탈한 사실을, 제46장에서는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제47장은 고종의 퇴위사실을, 제48장에서는 정미7조약의 진상을, 제49장에서는 군대해산과 박승환(朴勝煥)의 순국 사실, 제50장에서는 군대해산 후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제51∼58장에서는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상, 장인환(張仁煥) · 전명운(田明雲)의 의거, 이재명(李在明)의 의거,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등을, 제59∼61장에서는 국권상실 이후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통사는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가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점, 우리나라 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