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계덕(季德). 할아버지는 호부상서(戶部尙書) 한공의(韓公義)로, 아버지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한수(韓脩)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의 딸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우대언(右代言)과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한명회(韓明澮)는 그의 종손뻘이 되나, 아들이 없던 그가 명회를 길렀다.
우대언으로 있던 당시 우리나라는 많은 부분 중국 농서를 이용해왔다. 이에 불편을 느낀 태종은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중국의 고서에서 우리 실정에 간절히 필요한 말을 초록하되 우리말로 주를 달아 널리 보급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이 때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그가 왕의 뜻에 따라 1273년(원종 14) 원나라 사농사(司農司)가 엮은 『농상집요(農桑輯要)』 제4권에서 양잠에 관한 내용의 약 30%를 초록, 이에 이두문으로 주를 달아 1415년(태종 15) 우리나라 최초의 양잠에 관한 책인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를 초록하였다. 그의 초록 태도로 보아 양잠기술에 식견이 높았던 농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