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보(敬甫), 호는 정견(靜見). 한성우(韓聖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배의(韓配義)이고, 아버지는 진사 한사범(韓師範)이며, 어머니는 유명흥(兪命興)의 딸이다. 형은 대사헌 한현모(韓顯慕)이다.
1733년(영조 9)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수찬·이조정랑·승지·광주부윤(廣州府尹)·대사간·예조판서·좌의정 등의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762년 판의금부사로 나경언(羅景彦)의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고변이 있자 이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가릴 것을 적극 주청하였고, 이어 대제학으로서 사도세자가 죽은 경위를 밝히는 교서의 작성을 끝내 거절하여 삭탈관직되었다.
그러나 그 뒤 그 기개가 높이 평가되어 1766년 좌의정에 제수되어, 백두산의 망사(望祀)를 설행하게 되면서 갑산의 망덕산(望德山)에 제각을 세우게 하였고 1772년 영의정이 되었다.
얼마 뒤 정조가 즉위하여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장한 홍인한(洪麟漢) 등을 국문할 때, 불참한 죄로 삭직되고 이어 풍천에 유배되었다가 연안으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귀양이 풀렸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렀다. 1805년(순조 5) 시호 문숙(文肅)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