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들이 혁폐(革弊 : 폐단을 개혁하여 없앰)를 칭하고 발문취회(發文聚會 : 사람들에게 글을 돌려 모임을 소집)하였으나 혁폐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함양군수 오경선(吳敬善)은 난민들이 말하는 혁폐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 암행어사 이인명(李寅命)의 별단(別單)에는 세목가(稅木價)를 함부로 정한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선무사 이참현(李參鉉)은 전세(田稅)가 고가(高價)이기 때문이라고 보고하고 있어 일치하지 않지만 과다한 세의 부담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군수 오경선이 상경하고 없는 틈을 타서 일어난 민란으로 3월 16일에 시작하여 21일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소요는 수십일간 더 계속되었다. 주모자는 박만순(朴萬純)·허형(許炯)·우서구(禹書龜) 등이었으며, 강치문(姜致文)·장응팔(張應八) 등이 합세하였다.
난민들은 대부분 고노(雇奴)·용부(傭夫)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의관을 갖추고 모여 의논하였으나 마침내 몽둥이를 들고 집을 부수며 관가에 난입하였다. 죄수를 영(營)으로 보내는 것을 거역하고 관장(官長)을 위협하였으며 좌수(座首) 이하 장리(贓吏) 등을 쫓아내었다.
그리고 평소 민원(民怨)의 대상이었던 향리의 집 15여호를 부수고 불질러버렸다. 주도자 세 사람은 붙잡혀 진주로 이수(移囚 : 죄수를 옮김)되었다가 6월에 효수(梟首)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