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 8104049. 출생지 미상. 1948년 6월 1일 해군의 신병 10기로 입대하여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군본부의 정보국 특수공작대의 2조(하사)로서 특수공작대원들과 함께 경인지방의 북한군 병력 배치 상황과 규모, 병력 배치에 따른 보급 관계, 지뢰 매설상황, 상륙지점의 지형, 암벽의 높이, 기뢰 수송 사항,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인천 시내의 주둔병력의 규모와 활동내용 등을 수집하는 특수공작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50년 8월 22일 영흥도에 상륙 잠입하였다.
그 후 인천과 서울 및 수원 등 사지를 왕래하면서 수집한 첩보를 해군본부와 맥아더사령부에 제공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14일 새벽 2시 옆섬인 대부도에 주둔해 있던 북한군이 영흥도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영흥도로 공격해 왔다.
당시 영흥도에 있던 해군 의용대와 해군 정보국 소속의 부대원은 중대장 임병래 중위의 지휘 아래 북한군 1개 대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였으며, 최후에는 임 중위를 비롯한 군인 군속 10여 명이 남게 되었고, 이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이 때 홍시욱 이등병조는 임 중위와 함께 적에게 체포되어 특수공작임무의 기밀을 누설치 않으려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른 뒤 자결하였다.
1954년 1월 4일 을지무공훈장(乙支武功勳章)이 수여되었고, 한동안 그들의 시신은 그곳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1975년 해군 당국의 주선으로 25년만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