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목판본. 10대손 방(霶)이 『동문선』·『청구풍아(靑丘風雅)』·『대동시림(大東詩林)』·『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등에 수록되어 전하는 시편들을 초출하여 1629년(인조 7)에 간행하였다. 그 뒤에 병화로 인멸되자 12대손 만조(萬朝)가 1688년(숙종 14)에 중간하였다. 불분권 단책이다.
『홍애유고』의 권두에 문집목록과 경상도 안동임내 풍산홍씨세계가 있다. 이어서 칠언절구 17수, 오언율시 1수, 칠언율시 6수, 칠언배율 1수, 칠언고시 17수 등의 시가 실려 있다.
『홍애유고』의 부록으로는 「동래잡시(東萊雜詩)」가 있다. 이것은 편집자가 정포(鄭誧)의 「동래잡시」 10수 중 1편이 정포의 친구이며 동래현령을 지낸 홍간의 작품이라 생각하여 뽑은 듯하다. 여기에 대하여 그의 후손 보(靌)가 차운(次韻)하고, 이어 김치(金緻)·이민구(李敏求)·홍득일(洪得一)·정홍명(鄭弘溟)·홍방·박홍미(朴弘美) 등이 차운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집 끝에는 방의 발문과 만조의 지(識)가 있다.
홍간의 시편 중에서 「난부인(嬾婦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생산계층 민중들을 외면한 당시 호세가(豪勢家)들의 호화스러운 향락생활을 극히 대조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비판한 칠언고시이다.
또한, 「고안행(孤鴈行)」은 불우한 환경에 처한 작자 자신의 상황을 외로운 기러기에 의탁하여 표현함으로써 당시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은연중에 드러낸 작품이다.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에서 홍간의 시를 현우(賢愚)의 구별없이 모두 즐겨 외웠을 정도로 그의 시명이 높았다고 하였다. 혹자는 그의 시풍이 여전히 소식풍(蘇軾風)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시들 중에는 당나라 이백(李白)의 인간성을 사랑하고, 시어(詩語)도 즐겨 이백의 시 중에서 차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면 그의 시풍에 어느 정도 당시풍격(唐詩風格)이 스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애유고』는 완벽한 홍간의 작품집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시풍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규장각도서와 연세대학교·성균관대학교 도서관도서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