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제주에서 출생했다.
일본 주오[中央]중학을 중퇴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재학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고, 1929년 졸업했다. 1925년 서울청년회 집행위원과 조선사회주의자동맹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1927년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과 함께 간사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도쿄 유학생 문예단체인 제3전선사(第三戰線社)를 조직해 기관지 『제3전선』 발행을 주도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도쿄지부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도쿄에서 검거되었으며, 1930년 5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사회주의노선을 버리고 언론계에 투신해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일보』 상하이 특파원, 편집부 기자, 외신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으며, 이 기간 『삼천리』·『조광』의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다 만주로 건너갔다. 『만몽일보』와 『간도일보』를 통합해 창간한 친일 어용 한글신문인 『만선일보』에서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정치경제부장, 편집인, 편집국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1940년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의 신징[新京]분회 수도계림분회(首都鷄林分會) 평의원, 수도계림분회 주도로 결성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간사, 1941년 수도계림분회 문화부장 등을 맡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신징 지사장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 언론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며 「조선민중과 만주국의 개척」(『삼천리』, 1940.3), 「만주의 조선인」(『삼천리』, 1941.1), 「만주국경제의 발전단계」1∼4(『매일신보』, 1941.9.5∼11), 「재만조선인 만주국 발전에 협력」(『매일신보』, 1941.9.18), 「재만조선인 내선일체관념 앙양」(『매일신보』, 1941.9.21), 「북방 방위의 철벽 만주국이 부하(負荷)한 임무」(『매일신보』, 1942.3.1), 「재만조선인의 현세(現勢)」(『매일신보』, 1942.3.4~5), 「재만동포의 결전(決戰)생활」(『신시대』 1944.2) 등 주로 만주와 관련된 친일논설과 기사를 많이 기고했다.
해방 직후 귀국해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추천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과도입법정부에서 공보부 정치분석과장을 거쳐 1948년 10월까지 서울중앙방송국 국장을 지냈다. 1949년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혐의로 불기소 처리되었다.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공보처 고문을 지냈고, 1950년 3월 대한노동총연맹 부위원장 겸 자유노동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7월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홍순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91∼50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