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향교 ()

목차
유적
북한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학두봉(鶴頭峰) 아래에 있는 조선전기에 창건된 향교. 교육시설.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북한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학두봉(鶴頭峰) 아래에 있는 조선전기에 창건된 향교. 교육시설.
내용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1년(선조 34)에 현감 정하(鄭廈)를 중심으로 한 유생들이 힘을 합하여 대성전을 복원하였다.

1604년에 현감 윤수(尹綬)가 교생 강사홍(姜士弘)·강득문(姜得文) 등과 더불어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현감 김수현(金壽賢) 등이 명륜당을 증축하고 동재·서재와 광풍루(光風樓)를 설립하였다.

1681년(숙종 7)에 현감 황류(黃瑠)와 교양관 장진문(張振文)이 풍수설에 따라 북문 밖으로 옮겨 지었는데, 이 때의 규모는 5칸의 대성전, 명륜당, 각 4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색장간(色掌間) 등이었다.

1691년에 현감 최진한(崔振漢)이 전사청(典祀廳)·제기고(祭器庫)·서책고(書冊庫) 등을 증축하였다. 1811년(순조 11)에는 향교를 옮긴 뒤로 인재가 나지 않는다는 여론에 따라 현감 서유소(徐有素)가 학두봉 아래의 옛터로 이건하였다. 이 향교의 특징은 향교의 분교격으로 각 면마다 서재(書齋)를 두어 초학을 훈육한 일이다.

서재는 양사재(養士齋)를 비롯하여 수덕재(修德齋)·신왕재(神往齋)·남산재(南山齋)·만성재(晩成齋)·경의재(敬義齋)·사의재(思義齋)·경관재(敬寬齋)·매산재(梅山齋)·진수재(進修齋)·사선재(思先齋)·용천재(湧泉齋)·모의재(慕義齋)·모선재(慕先齋)·남학재(南學齋)·사문재(思文齋)·삼영재(三英齋)·육영재(育英齋)·수성재(須成齋)·삼회재(三會齋)·동산재(東山齋)·견룡재(見龍齋) 등 22개가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뒤에 국민학교로 발전되었다.

1900년대 초 이 향교의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과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우리 나라 18현(十八賢) 및 중국 94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여 왔다. 1950년대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

참고문헌

『태학지(太學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홍원구지(洪原舊誌)』
『홍원군지』(홍원군민회, 1973)
『함경남도지』 (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