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백영(伯泳). 서울 출신. 홍의명(洪義命)의 손자로, 홍일모(洪一謨)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진사로서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6년(고종 3) 조정에서는, 갈수록 심해지는 지방의 간리(奸吏)·토호들의 탐학 행위를 철저히 파악하여 징계하기 위해 경기·경상·전라·공충도(公忠道 : 충청도)에 일제히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이때 공충도에 파견되어 백성들로부터 철저히 수소문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던 토호들을 파악하여 죄를 주고, 수령 중 선행을 행한 자와 실정한 자를 파악, 보고하였다. 그 공으로 1867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875년 안동부사로 있을 때 울산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유리(由吏 : 지방 관아에 딸린 이방(李房)의 아전) 김양서(金養舒)가 횡령한 공전(公錢)을 충당하기 위해 울산 부민들로부터 부당하게 5,000냥을 거두어, 이에 부민들이 반발하여 일으킨 난이었다.
홍철주는 안핵사(按覈使)로서 울산으로 가 난을 주도한 3인과 김양서를 목 베었다. 또한 난에 참여한 부민과 이를 막지 못한 향리 등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지휘감독 책임을 물어 2명의 전울산부사를 의금부에서 조사하게 하였다.
1876년 이조참의, 187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예방승지를 거쳐 1881년 이조참판, 1883년 한성부판윤, 1884년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한 직후 사대당 내각이 수립될 때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85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예조판서, 1886년 형조판서·공조판서·상호도감제조(上號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1887년 3월 전보국총판이 되어 전선을 설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6월부터 1891년 3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형조판서를, 세 차례에 걸쳐 예조판서를 맡았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