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순천 출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유럽 외교 및 파리강화회의의 외교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파리에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해, 설치한 주파리위원부(駐巴里委員部)에서 서기장(書記長)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김규식을 도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각종 강연회 · 토론회를 개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침략사실을 폭로 규탄함으로써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이승만(李承晩)의 송환명령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자 주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인 이관용(李灌鎔)과 함께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프랑스어 책자를 간행, 세계 여론에 한국문제를 호소하였다.
이 해 10월 이관용이 사직하자 위원장 대리로서 정부의 대유럽외교를 전적으로 담당, 활약하였다. 10월 17일 프랑스 인권옹호회 간부회의에서 한국문제보고회를 개최하였다. 1920년에는 매월 1회 『자유한국(La Coree Libre)』이라는 월간지를 발간,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대영외교(對英外交)에도 적극성을 띠어 1921년에는 「영일동맹과 한국」이라는 팜플렛을 발간하였다.
매켄지(Mckenzie, F. A.) · 그레브스(Graves, J. N.) 등 친한파 인사들과 활발히 접촉해 한국문제 지지자를 포섭하여, 한국독립후원단체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0년 10월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원 17명 등 저명한 영국인사 62명을 규합해 대영제국한국친우회(大英帝國韓國親友會, The League of Friends of the Korea in Great Britain)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파리위원 겸 런던주차위원으로 외교활동에 진력하였다. 1921년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 서재필(徐載弼) 등을 보좌하며 외교활동에 노력하다가 1923년 4월 뉴욕에서 죽었다.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