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제방은 1909년 일본인들이 수리조합을 설립할 때 증축한 것으로 옛 원형의 것은 아니나 옛 제방이 흡수된 것이므로 이것을 황등제라 할 수밖에 없다. 이 황등제는 이 지방에서 일명 요교호(腰橋湖)라고도 불린다.
황등제의 축조연대는 미상이나 황등제가 김제의 벽골제, 고부의 눌제와 더불어 국중삼호(國中三湖)로 불린 것을 보면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황등제의 규모는 『동국문헌비고』에 “길이 900보, 둘레 25리(長九百步 周二十五里)”라는 기록이 있으나 지형으로 보아 증축하기 전의 제방길이는 1,100m 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축 후의 몽리면적은 3,343이나 증축 전의 정확한 몽리면적은 미상이다.
증축 전의 용수시설로는 제방의 남단에 석축으로 시설한 석수문(石水門)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전해진 것이 없다. 황등제는 우리 나라 옛 제언 중에서 문헌상 자료가 극소하기 때문에 관리상태 등 내력은 알 길이 없으나 이곳으로부터 4㎞ 남쪽에 있는 옥야현(沃野縣 : 지금의 古縣洞)에서 관리를 담당해 왔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서에도 황등제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벽골제 · 눌제와 같이 조선시대 이전에 폐제(廢堤)된 뒤 조선시대에도 전혀 보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너진 제방에 허리다리[腰橋]가 있었다는 사실은 전라북도 농지개량조합 황등출장소에 보관중인 비석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이 다리 부분에서 출토된 비석에는 1778년(정조 2)에 서만재(徐萬載) 등이 시설비를 들여 다리를 시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등제는 조선 말기까지 폐제되어 내려오던 것을 일본인들이 증축하여 재활용해 오다가 1935년 완주군 운천면에 경천저수지가 신설되면서 불용시설이 되어 저수지 바닥마저 현재 논으로 개답하여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