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토마스. 충청남도 덕산현(현 예산군 지역) 출신. 본명은 인철(寅喆). 내포(內浦)의 사도(使徒)로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연산에 거주하던 1796년 밀사로 선발되어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귀국길인 1797년 초에 옥천희(玉千禧)를 만나 교회로 인도한 뒤 밀사로 활동하게 하였다. 그리고 1797년과 1799년에도 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성유를 받아오거나 조선 교회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1800년 7월 연산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황심은 쌍림동에 거처하면서 황사영 등 여러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춘천으로 피신하였는데, 황사영(黃嗣永)이 가까운 배론(舟論)에 피신하여 있음을 알고 그를 찾아가 주 신부의 순교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조선교회의 이와 같은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방도를 논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황사영은 북경 주교와 면식이 있는 황심의 이름으로 백서(帛書)를 쓰고, 황심은 그것을 옥천희로 하여금 동지사 편에 끼어서 북경에 들어가 주교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음력 9월에 황심과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백서 건은 백일하에 드러나 만사가 허사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황심은 역모(逆謀)에 동참한 죄로 능지처사형(凌遲處死刑)을 선고받고 음력 10월 23일에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