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식 고인돌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1971년 10∼11월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이곳에 분포한 많은 고인돌 중 송신동·평촌·석장골 등 3개 지역의 유적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황주천(黃州川)에 흘러드는 지류의 우안(右岸)에서 동쪽으로 뻗은 오덕산의 남쪽 골짜기에는 오덕리 소재 마을인 송신동을 중심으로 해서 수십 기씩 무리를 지어 모두 14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발굴은 고인돌 21기를 비롯해 집터와 돌림돌〔環狀列石〕유적 각 1개소를 조사하였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북방식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석장골과 평촌에는 남방식도 일부 있다.
평촌 고인돌은 황주천의 지류인 큰 개울의 왼쪽 기슭에 이루어진 구릉진 충적평야에 분포되어 있다. 땅 위에 드러나 있는 것 외에도 상당수가 이미 파괴되었거나 땅 속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모두 4개 지점에서 51기가 확인되어 그 중 제2지점의 5기가 조사되었다.
그 중 대표되는 제10·11호 고인돌은 제2지점의 중심에 위치한다. 남북 17m, 동서 8m, 높이 1m 가량의 타원형 묘역 안에 모두 3기의 고인돌이 각 2m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가지런히 형성되어 있었다. 3기 중 가운데 것과 북쪽 것만 발굴되었다. 남쪽 것은 뚜껑돌이 밀려나 있었고 이미 파헤쳐져 확인작업에 그쳤다.
제10호의 무덤칸 크기는 85㎝(남북)×60㎝, 높이 45㎝이다. 유물은 돌도끼·돌살촉 각 1점과 팽이그릇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제11호의 무덤칸 크기는 140㎝ (남북)×80㎝이다. 유물은 돌검 1점과 대퇴골 1점이 출토되었다.
석장골의 고인돌은 냇가의 북쪽 구릉지대에 모두 세 군데에 분포되어 있다. 남방식 고인돌이 일부 보이지만 북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발굴은 제2·3지점에서 각 1기씩 조사되었다. 그 중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은 제2지점 제2호 고인돌이었다.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덮개돌과 남쪽의 긴 벽은 넘어져 있었으나 무덤칸의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덮개돌 크기는 440㎝(동서)×240㎝, 두께 40㎝이다. 그 아래 이루어진 무덤칸의 크기는 1.6m×1m, 높이 1m이다.
여기에 3매의 판돌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로 세워 3, 4개의 작은 칸을 이루었다. 무덤칸 안에는 부식토가 가득 쌓여 있었으나 유물은 없고 대퇴골의 중간토막 1점이 수습되었다.
송신동 고인돌은 마을 북쪽의 들판에 분포되어 있다. 모두 3개 지점에서 북방식 고인돌 41기가 확인되었다. 제1지점과 제2지점의 고인돌떼 중앙에는 돌림돌 유적이 형성되어 있었다. 발굴은 그 중 제1지점의 11기와 제3지점의 1기가 조사되었다.
이 중 제1호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길이(남북) 8.3m, 너비 6.3m, 두께 50㎝이다. 무덤칸의 크기도 3m×2m, 높이 2.5m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북방식 고인돌 중에서는 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제20·22·31호 고인돌은 석장골 고인돌에서와 같이 무덤칸 안에 3, 4매의 판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칸막이시설을 하였다. 유물은 살촉·도끼·돌검·톱니날도끼〔多頭石斧〕 등의 석기류와 팽이그릇〔角形土器〕에 속하는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송신동 집터 유적은 송신동 제2호 고인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집터는 길이 8m, 너비 4.3m의 장방형으로서 긴 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하고 있었다. 원지표로부터 45㎝ 아래에 이루어진 집터의 바닥은 불탄 재로 덮이고, 남쪽과 북쪽의 중앙에는 지름 40∼50㎝의 둥근 화덕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집터의 네 모서리에는 지름 20㎝의 기둥구멍이 나있었다. 탄화된 기둥들은 집터 중심을 향해서 넘어져 있었다. 유물은 도끼·돌검·갈판·자귀·돌돈〔石貨〕 등의 석기류와 팽이그릇류에 속하는 토기들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