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令旨)와 함께 왕세자가 내리던 명령 또는 명령 문서를 가리킨다. 국왕의 전지(傳旨) 또는 교지(敎旨)와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왕세자가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대리청정을 하거나 왕이 궁궐에 있지 않을 경우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할 때 사용하던 왕세자의 명령 또는 왕세자 명의로 발급하던 명령 문서를 말한다. 왕세자의 명령을 휘지(徽旨)라고 한다는 규정은 세종 대에 「대리청정절목」으로 마련되었다. 명령 문서로 사용된 휘지의 예로는 세종 대에 왕세자(후의 문종)가 문무관 3품 이하 관직을 제수하면서 발급한 임명장 「휘지」가 있다. 또 숙종 대에 왕세자가 관원의 위패(違牌: 왕명으로 신하를 부르는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와 관련하여 발급한 왕세자의 명령서 「추고 휘지(推考徽旨)」가 있다. 그리고 표신(標信)의 일종으로 국왕 부재 시에 왕세자의 명령을 확인 또는 전달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던 휘지패(徽旨牌)도 있다.
세종이 왕세자의 대리청정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하는 과정에서 왕세자의 명령을 휘지라고 규정하였다. 숙종 대에 시행한 왕세자(후의 경종)의 대리청정 기간에는 ‘하령(下令)을 휘지라 한다’, ‘전지(傳旨)를 휘지라 한다’는 내용으로 개정되었다. 영조 대에 왕세손(후의 정조)이 대리청정할 때에는 ‘교지(敎旨)를 휘지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따라서 휘지는 왕세자가 내리는 명령이나 왕세자 명의로 발급하는 임명장 또는 명령 문서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다만 임명장의 경우, 세종 대 대리청정 기간에는 휘지라는 명칭으로 임명 문서가 발급되었지만 숙종 대 대리청정 기간부터는 영지라는 명칭으로 임명장이 발급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448년(세종 30)에 왕세자가 문무관 3품 이하 관원을 임명하는 문서에 국왕의 대보(大寶) 대신 동궁의 인장을 찍고, 교지를 휘지로 바꾸어 쓰도록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1449년(세종 31) 12월 26일에 정식(鄭軾)에게 발급된 「휘지」의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왕세자가 발급하는 임명장의 형식은 ‘문무관 4품 이상 고신식(告身式)’에 준하여 작성하되 교지를 휘지라 하고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 대신 왕세자인(王世子印)을 찍었다. 문서의 형태는 낱장이고 세로보다 가로가 두 배 정도 크며, 서체는 행초서로 썼고 본문 내용을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기재하여 상대적으로 왼쪽 여백을 많이 남겨 두는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왕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발급한 명령 문서로는 패초를 어긴 관원의 처벌을 명령하면서 내린 것이 있다. 이와 관련된 실물 예로 1719년(숙종 45)에 왕세자(후의 경종)가 대리청정할 때 발급한 「추고 휘지(推考徽旨)」가 남아 있다. 관원의 위패에 관한 처벌 명령은 패초 사안과 처벌 종류에 따라 국왕의 명령(파직 전지罷職傳旨)과 왕세자의 명령(추고 휘지推考徽旨, 체파 영지遞罷令旨)으로 구분하여 처리하였다.
이 외에도 휘지는 표신의 일종으로 휘지패로 제작되어 국왕이 궁궐에 없을 경우 왕세자의 명령을 지시하거나 전달할 때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국왕이 도성 밖에 있어 중대한 사안을 국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없을 경우에 왕세자의 휘지를 받아서 시행하였다. 또 궐문이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휘지를 사용하였는데, 이 경우 휘지와 함께 자지(慈旨)나 내지(內旨)도 같은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궐내에 머물러 있을 때는 대개 휘지를 사용하였다.
표신으로 사용된 휘지의 실물 예로 영조 대에 사도세자가 사용한 「휘지패」가 남아 있다. 휘지패는 상아로 제작하였고 앞면에는 ‘휘지’라는 글자를 새기고 뒷면에는 국왕의 어압을 새기고 붉은색으로 마감하였다. 앞면에 천(天)·지(地)·현(玄)·황(黃)을 각각 새겨 넣어 모두 4부의 휘지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왕세자의 명령 전달 방식 및 국정 운영을 위한 문서 행정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