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묘는 처음 1897년에 경기도 고양군에 모셔졌으나, 1906년 경기도 파주군으로 옮겨졌다가 1966년 4월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묘역은 조선시대 능원제도(陵園制度)를 따르는 듯 하나, 대군에 맞도록 간략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상하 2단으로 나뉘어졌다.
상단에는 호석으로 둘러싸인 단분(單墳)인 봉분과 그 둘레에 석호(石虎), 석양(石羊) 각 1쌍이 있고, 그 바깥에 곡담과 사성이 둘러쌓여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이 있다. 하단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좌우에 각 1쌍이 있고, 묘 앞 중앙에는 방형의 장명등이 놓여져 있다.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며 남연군의 아들로 헌종 9년(1843) 흥선군에 봉해졌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섭정을 맡아 조선왕조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당색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고집해 개항의 시기를 놓쳤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은퇴했으며, 이 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출동한 청 군대에 납치되어 청나라 톈진[天津]에서 4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885년 귀국한 후에도 운현궁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원세개와 협력해 장남 완흥군 이재면(李載冕)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다. 1895년에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에 간여하면서까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