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전문학교 상과 학생들이 1926년 5월 창립한 ‘경제연구회’가 발간한 학술지로 1933년 제4호를 발간하고 중단되었다. 학술지의 내용은 경성제국대학의 관학적 학풍에 반대하는 반일적 기조 아래 맑스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소개와 연구가 중심이었다.
학교 당국의 지원으로 1926년 5월에 창립된 연전 상과생들을 회원으로 하는 ‘경제연구회’가 창립되었다. ‘경제연구회’는 1927년 2월 제2회 정기총회를 열고 잡지 발간을 결의하였고, 1927년 12월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당시 발행자는 ‘경제연구회’의 연구부장을 담당한 정진채(鄭鎭采)로 되어 있다.
1927년 12월에 발간된 창간호는 크기는 국판, 등사본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면수는 165면이다.
제2호는 1929년 3월 발행되었으나 내용을 확인 할 수 없다.
제3호는 1932년 속간되었으며, 책의 크기는 46배판, 인쇄본으로 총 22면으로 구성되었다.
제4호는 1933년 2월에 발간되었다. 판형과 면수는 확인이 어려우나 맑쓰주의적 성격을 강화한 굵직한 논문들을 실었다고 한다.
제5호는 발간을 위한 논문 모집 광고는 있었으나 연전학생회 재건 문제와 겹쳐 발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경제연구회사건’으로 연구회가 해채되면서 잡지의 간행도 중단되었다.
1920년대 중반 학문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연희전문에서도 학생들의 학술활동을 진작하는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 결과 1926년 5월 연전 상과생을 중심으로 1926년 5월 경제문제에 대한 연구와 회원 간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경제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창립 후 제1회 정기총회에서 상과 교수이던 이순탁의 도움을 받아 통상회원(상과 학생) 이외에도 상학부 학생은 찬조회원으로 그리고 졸업생은 특별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경제강연회를 개최하여 학생들의 연구를 진작했으며 다음 해인 1927년 2월 제2회 정기총회에서 잡지 발간을 결의하여 1927년 12월 『경제연구』가 창간되었다. 이어 1929년 3월 제2호가 발간되었으나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창간호에는 권두언, 「「경제연구」창간에 임하야」(林炳哲), 「「부정의 부정」의 부정」(정진채), 「자본의 의의」(朴旺勤), 「중등계급은 무엇이냐」(九浬生), 「불란서혁명당시의 경제사상」(李寬求), 「자본주의경제조직에 대한 「아담스미쓰」와 「맑쓰」의 경제사상 及 其에 대한 음미」(吳行吉), 「니히리쯤에 대한 편적 고찰」(宋運淳), 「싼듸칼리즘」(林炳哲), 「공중보험(항공보험)」(정진채), 「조선전융기관조직에 취하여(朝鮮全融機關組織에 就하야)」, 「상공업으로 본 조선」(韓官鎬), 「조선인과 농업」(朴鼎均), 「농촌사회문제로 본 농촌부업의 지위」(竹生), 「조선재래의 상업증권에 관하야」(정진채), 「조선상업용어」(정진채), 「농촌경제의 일편」(趙東玭), 「본교도서실장서조사보고」(연구부), 「편집여언」 등 19개의 글이 실렸으며, 경제연구회규칙, 동회록, 사업경과보고 등도 실려 있다.
그러나 세계공황 이후 사상계가 경직되면서 1929년 연전 상과에도 동맹휴학사건이 일어나 학생 98명이 제적되었다. 이후 ‘경제연구회’의 운영이 어려워졌고, 『경제연구』는 휴간되었다.
1920년대 말 몰아친 식민지 파쇼화로 강화된 식민지 학풍은 192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경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한국인들도 민족적 학풍 강화에 나섰으며, 이 운동의 중앙에 연전 상과의 교수인 백남운(白南雲)과 이순탁(李順鐸)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사의 보편성과 민족적 발전을 위한 학문적 노력으로 ‘조선인식론’을 제기하고 연전 상과에 상과연구실을 만들었으며, 1933년 6월에는 ‘조선경제학회’를 결성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추진하였다.
이런 연전 상과의 학문적 노력이 학생들에게도 전달되어 ‘경제연구회’ 활동도 재개되었다. 1931년 4월 임시총회를 열어 회칙 제3조를 개정하여 연구회 목적을 경제이론과 실제문제의 실천을 추가하고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를 신규사업으로 결정하였다. 이런 연구회의 노력으로 1932년 제3호가 속간되었다.
제3호에 실린 글은 「권두언」(기표), 「속간사」(서강백), 「경기론비판」(최성호), 「백화점과 소매점의 비교」(양기철), 「경제사상사연구」(탁기연), 「Present Day Business Letters」(P. Kenneth Lim), 시 3편, 「생활과 구심력」(정진석), 「통계」(편집실), 「경제일지」(편집실) 등 9개이다.
역사 발전의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을 정확히 인식하려는 과학적 연구를 학문적 기반으로 설정한 연전 상과의 연구 경향은 민족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경향은 1933년 2월 발간된 제4호에는 맑스주의적 이론에 입각하여 현실을 분석한 논문들의 게재로 나타났다.
제4호에 실린 글의 제목은 「조선사관 수립의 제창」(백남운), 「일본 파시즘 운동의 역사적 전망」(서명호), 「현대조선의 재검토」(박원철), 「공황리의 세계와 소련의 5개년 계획과 성과」(이병묵), 「물가 폭등의 수난과 근로계급」(안효병), 「군축회의 해부」(김교영) 등이며, 「근로계급과 쟁의」(김운봉)과 「계급론」(김기정)의 글은 사정이 있어 실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용어를 해설하는 글에서는 이데올로기, 금리기식자(金利寄食者), 쿠데타, 경제참모본부, 좌익소아병, 산업예비군, 스팀슨주의, 일화견주의(日和見主義), 원시적축적, 인도주의, 사회파시즘, 등을 사회주의적 견지에서 해설하였다고 한다.
1933년 6월부터 ‘경제연구회’는 1932년 1월 해산된 연전학생회 재건운동에 나서 ‘학생회재건위원회'를 만들었으나 여러 이유로 학생회 재건은 무산되었다. 이에 ‘경제연구회’는 1935년 5월부터 다른 학과 학생들도 연구회에 가입할 수 있게 하여 ‘경제연구회’를 실질적인 연전학생회로 만들어 갔다. 그리고 문과 상과 수물과가 연합하여 학내 신문 『연전타임스』를 발간하기로 결의하고 1935년 9월 『연전타임스』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연전타임스』발간 비용 80원은 경제연구회가 부담하였다. 이런 학내 활동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제연구』제5호는 발간을 위한 논문모집 광고가 있었지만 발행되지 않았다.
1936년 말부터 일제의 사상 탄압은 더욱 혹심해졌다. 연전상과 교수들이 주재하던 ‘조선경제학회’는 해산되었고 학생들의 ‘경제연구회’도 거의 활동을 중단하였다. 이런 가운데 일제는 1938년 2월 ‘경제연구회’가 주관한 웅변대회를 빌미로 ‘경제연구회사건’을 일으켰다. 일제는 ‘경제연구회’를 좌익 학생 단체인 ‘연전학생회’의 실질적인 재건체로 지목하고 검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졸업생과 이들의 사상적 배경으로 지목된 ‘적색교수그룹’ 등 60여명을 체포하였고, 학생과 교수 그리고 학교 당국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수색을 벌여 각종 자료 2,212종을 압수하였다. 수사과정에서 학생 임종배가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1938년 12월 15일 수사를 일단락진 경찰은 이순탁, 백남운, 노동규 교수를 치안유지법으로 검찰에 송치하고 나머지 14명은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3인의 교수에 대한 재판은 1940년 4월에 시작되었으며, 1940년 12월 21일 선고 공판으로 종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연전 상과 학생들의 경제연구회는 해체되었다. 이로 『경제연구』의 발간은 중단되었다.
이후 연전 상과 학생들은 회원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상우회(商友會: Commercial Club)’를 결성하여 ‘경제연구회(The Economic Club)’와 단절을 도모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연희전문에서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던 민족주의 학풍이 학문적인 모습을 찾아가던 시기이다. 이 시기 민족주의 학풍의 대표자인 연전 상과의 교수들의 지도 아래 운영되던 학생들의 학술단체인 ‘경제연구회'의 활동과 연구 노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