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 이후한만용(韓晩容), 정현(鄭炫) 등을 중심으로 현역 및 퇴역 군인들이 모여 인우회(仁友會)라는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학회명은 회장 한만용이 주장하여 보인학회(輔仁學會)라고 하였는데, 『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에서 따온 것이다.
친목회를 모체로 하여 교육열이 강한 경성부 내의 유지 및 인근 마을의 주민들을 모아 1908년 3월 보통교육 및 문화의 발달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인학회를 결성하였다. 초대 회장으로 전참서관 한만용(韓萬容)을 추대하고, 총무는 부령 안종환(安宗煥), 평의원은 육군법원장 엄주익(嚴柱益) 등 20여명으로 구성하였다.
1907년 4월 주요사업으로 소학교 설립과 인재양성 등을 결의하고 학교 설립을 준비하였다. 학교 설립과 그 취지가 알려지자 공생사(共生社), 영익사(永益社), 내자사(內資社)등의 여러 계 조직과 인력거꾼, 기생, 상인, 청소부, 노동자 등이 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08년 6월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 145번지)에 조그만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여 보인학교를 개학하였다. 수업연한 4년의 초등 수준의 사립학교로서 45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학회 결성 1년 후인 1909년 학부에서 조사한 학회 상황에 의하면, 보인학회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공병 중좌를 지낸 바 있는 퇴역군인 김기원(金基元) 등이 대표를 맡았고, 회원 405명, 유지 경비 연 163만 6500원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서북학회, 교남교육회, 호남학회 다음으로 가장 많은 회원을 가진 학회가 되었다.
보인학회는 대한제국 말기에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애국계몽학회로, 보인학교를 설립 운영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