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한성중학(현 경기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4학년 때 일본의 나고야(名古屋) 제8고 문과에 합격하여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44년 가을 일본의 교토[京都]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해방으로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부터 서양사를 전공하였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 전사관으로 활동했으며, 1952년에는 ‘역사학회’ 창립, 1958년에는 '한국서양사학회'의 창립에도 관여했다. 1953년부터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출강하였으며, 연세대학교에서 부교수를 지내다가 1961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 서양사 전임교수로 부임하였다.
1963년부터 1년 6개월 동안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에서 연구하였다. 이후에도 혁명사에 관한 논문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으며 1975년「Maximilian Robespierre의 정치사상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행정에 관여하여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편집국장, 교양학부 부장, 재외국민교육연구소 소장, 인문대 학장을 지냈다.
1980년 대학 행정에서 물러나 교수와 연구에 몰두하였다. 1982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88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기념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90년 서울대 인문대 사학과에서 정년으로 퇴임했다. 이후 명예교수로 지내다 2001년 7월 사망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학문 활동을 시작한 민석홍은 전후 복구와 근대화에 연구를 집중하였다. 그의 연구는 근대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유와 평등의 조화 즉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프랑스혁명과 민중운동, 영국의 수평파와 젠트리 논쟁, 미국혁명에 관한 연구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들 연구를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 산업화와 민주화가 동시에 추진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는데, 이것은 산업화를 중시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있던 한국 사회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민주화를 근대화의 모델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한편 로베스피에르와 크롬웰에 관한 연구는 한국의 개발독재에 대한 시사평론으로 이어졌다. 서구 학문의 이해에 기반한 근대화와 산업화에 대한 시사평론은 당시 한국 사회의 지성들에게 사회 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어서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교행정에 오래 참여하면서 학문적 활동이 뜸하여 개발독재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민석홍 연구의 또 다른 분야는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을 소개한 것이다. 역사학의 입장에서 정치 경제 사회를 정리하여 역사 연구 방법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자본주의와 종교라는 정신적 유산과 봉건세력의 몰락과 근대 세력의 형성에 대한 탐구는 문헌고증에 매몰되었던 역사 연구에 역사사회학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사회세력의 갈등과 극복과정을 역사적으로 구명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또한 프랑스 영국 미국 혁명에 관한 연구서와 문화에 관한 저작들 번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불모지이던 서양사학계에 기초적인 사실부터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일련의 번역서들은 서구에서 형성된 프랑스혁명에 관한 역사 연구 방법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업들이었다. 이를 통하여 한국 사학계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시각과 연구 방법론의 개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76년『서양근대사연구』로 한국일보사 제정 제16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작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1990년 국민훈장 모란장도 받았다. 프랑스로부터 국가공로훈장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