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계(중국) 출신 공산당원으로 김일성의 비서실장 및 도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루마니아 및 불가리아 대사, 외무성 부상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김일성과 대립적 입장을 취하였고,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숙청당하였다.
고봉기는 1916년생으로 본적은 함경남도이다. 1935년경 중국으로 건너가 1938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년 동안 항일투쟁을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에는 평북 정주군당 책임비서를 하고, 평북도당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이후 김일성의 비서직인 중앙당 기요과장을 역임하고, 평북도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6․25전쟁 당시 고봉기는 함북도당 위원장을 하다가 좌천되어 루마니아 외교관과 불가리아 대사를 겸직하였다. 그리고 휴전 직전에는 외무성 부상을 역임하였다. 1955년 김일성에 의해 황해남도 당위원장직을 수행하다가, 김일성과 대립 관계에 서면서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당하였다. 1959년에는 다시 소비조합 중앙부위원장직을 수행하였다.
해방 후 평북 정주군당 책임비서를 하면서 당 사업과 관련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고봉기는 평북도당 조직부장이 되었다. 북조선로동당이 발족한 후 보안간부훈련대대에 부임한 김일의 추천으로 고봉기는 ‘기요과장’이라는 공식명칭 하에 김일성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초 고봉기는 함북도당 위원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명천, 어대진 일대에서 국군을 저지하는 작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전쟁 동안 발생한 함경도의 부정부패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루마니아 외교관(불가리아 대사직 겸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다가 6․25전쟁 휴전회담 마지막 무렵에 다시 외무성 부상으로 복직되었다. 1953년 정전 후 평양당위원장으로 발령받고, 평양 복구 작업 및 평양시 당단체들이 김일성을 지지, 옹호, 보위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1956년에는 ‘8월 종파사건’으로 불리는 8월 당중앙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이 숙청되면서, 고봉기 또한 황해남도 당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1958년 3월에 개최된 당 1차 대표자회의 이후 결국 수감되었다. 1959년 말에 출소하여 소비조합 중앙 부위원장으로 임명받고 활동하였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