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양은 김규식의 측근으로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성사시킨 실무자이다. 또한 ‘민족자주연맹’과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의 핵심인물로서 김규식에 의해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었다. 그는 미국과 이승만 세력의 단선․단정 강행 움직임에 반대하며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연합을 실현시키기 위해 많은 역할을 하였다.
1913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한 권태양은 안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 심상과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46년에는 김규식의 측근으로 좌우합작위원회 서무부장, 민족자주연맹 비서처 총무,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남측 대변인으로 대회를 성사시켰다. 그는 1966년에 생을 마감했다.
1947년 10월 18일 제62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남한에서는 단선․단정 움직임이 노골화되었고, 북한도 인공 수립으로 치달았다. 1947년 10월 15일 남한에서는 한독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서 남북제정당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미․소양군 철수, 38선 철폐, 남북통일선거의 절차 및 집행, 국민의회의 완성, 중앙정부 조직 등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1947년 10월 18일에는 ‘조선독립과 양군 동시철병’을 주장하는 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의 ‘5당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1947년 10월 19일에는 민주독립당이 창당되었고, 12월 20일에는 민족자주연맹이 정식 출범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권태양은 김규식, 홍명희, 원세훈, 리극로, 김붕준, 김성규 등과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7년 12월 중순과 1948년 2월 초순에 남한과 북한의 로동당 지도부는 ‘정치국연석회의’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투쟁을 보다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북조선로동당은 성시백의 서울공작위원회를 통하여 김구에게 안우생, 김규식에게 권태양, 조소앙에게 김흥곤, 홍명희에게 그의 아들 홍기무와 비서였던 김기환을 통해서 남북협상을 진행시켜 나갔다. 1949년 3월에 권태양은 성시백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제정당 지도자협의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전달받고 김구와 김규식을 설득하기도 했다.
2003년 9월 2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조국통일상’을 수여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