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52년 제5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전원회의 보고서, 결정서, 붉은 편지 이 세 가지 문헌을 기준으로 하여 1953년 1월∼9월까지 제1차 문헌토의사업을 진행하였다. 이후 한 달 반 동안 1차 사업에 대한 총결산을 진행한 후 불충분 사항에 대해 제2차 문헌재토의사업이 1954년 5월까지 진행되었다.
1952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김일성은 그동안 수집한 자료에 입각해 당내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적 경향, 개인 영웅주의를 비판했다. 결국 사흘간의 전원회의에서 주로 당 내부와 사회단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잘못된 경향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결정서’와 ‘전 당원에게 보내는 붉은 편지’가 채택되었다. 1953년 1월부터 북한은 전원회의 보고서, 결정서, 붉은 편지 등 세 가지 문헌을 토의하는 ‘문헌토의사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토의는 세포 단위로 진행되었다. 문헌토의 방식은 앞서 세 가지 문헌을 기준으로 하여 당원들의 당생활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통해 개별 당원의 당생활, 당성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또한 출신에 대한 구별없이 당원 전원을 대상으로 삼았다.
1952년 12월 제5차 전원회의 이후 시작된 문헌토의사업은 1953년 3월 사업 과정에서 ‘박헌영 간첩사건’이 터지면서 확대되었다. 결국 1953년 6월 4일 당중앙 정치위원회에서 김일성은 ‘제5차 전원회의 문헌토의사업’의 진행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하고, 그것을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문헌토의사업은 ‘제5차 전원회의 문헌재토의사업’으로 수정되어 진행되었다.
문헌토의사업은 지방의 하부 당․정권기관에 대한 단속을 더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목적하에 진행되었다. 이는 중앙기관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져 온 숙청작업을 하부기관, 조직까지 확대하고, 숙청의 범위도 박헌영, 리승엽을 중심으로 한 그룹뿐만 아니라 남로당 조직원과 그 관련자 전체로 확대한다는 뜻을 내포했다. 결국 숙청작업은 ‘문헌재토의사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로당 관련 최고인민회의대의원 360명, 금강정치학원생 1천여 명, 기타 전남로당원 5백명 등 2천여 명이 새로운 조사, 검토대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문헌토의사업은 김일성 권력 강화를 위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