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일은 일제강점기에 중국공산당 중앙 직속 조선민족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북조선로동당 창립 당시부터 1949년경까지 황해도당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중앙당농업부장을 하였다.
하지만 1956년 말에서 1957년 초까지 황해도 일대의 농민 반발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황해남도 당위원장 고봉기, 황해남도 인민위원장 백순제, 개성시 인민위원장 이달진과 더불어 1957년 2월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1915년 소련에서 출생, 이후 중국 훈춘으로 이사하여 1927년에 소학교를 졸업하였고, 1931년까지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1년부터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하였고, 1932년 간부학교에서 군사정치를 연구하였으며, 1933년부터 동북항일의용군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박훈일은 중국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파견되어 1938년에 동양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38년 중국공산당에 복귀하였고, 1944년에 설치된 중공중앙 직속 조선민족지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1945년 9월 화북에서 동북으로 이동하던 중 조선의용군에 가입하였고, 1945년 12월부터 1946년까지 조선의용군 제7지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중국 길림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 발발로 조선의용군이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자 박훈일은 제5지대 정치위원으로서 동만주로 되돌아가 동북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1946년 8월 28일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에서 대회주석단 31명 중 한명으로 선출되었고, 1946년 10월에는 북로당 황해도당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3월 27∼30일까지 열린 북조선로동당 2차 대회에서 종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김일성을 지지하면서, 황해도 실무책임자 무정과 도당책임비서 최경덕, 산업국, 상업국, 사법국의 사업을 비판하고, 선전국장 허정숙도 비판하였다.
1956년 말에서 1957년 초까지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발사건으로 김일성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시작하였고 박훈일도 이 과정에서 숙청되었다. 박훈일은 1957년 2월 14일 관개수리부문 열성자회의, 21일 반농반어․수산협동조합 열성자회의에 참석한 이후 공식석상에서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